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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지키는 건 결국 말 한마디

수고했어, 고마워, 미안해, 괜찮아

by 원정미


나는 지금 평범하지 않은 삶의 형태로 살고 있다. 남편도 나도 직장도 그만두고 작정하고 아이들과 함께 여행만 하기로 한 삶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우리의 삶을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우리가 늘 새로운 곳에 가서 멋있는 관광지를 보고 대자연에서 충분히 쉼을 느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모아돈 돈을 미래가 아닌 지금 현재여행에 쓰고 있는 셈이다. 매달 통장의 잔고가 팍팍 줄어들어갈 때마다 사실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게 솔직한 마음이다. 거기다 12-13미터짜리 캠핑카를 끌고 사춘기 두 아이들을 데리고 사는 길 위에서의 삶은 직장을 다니는 것만큼 정신이 없고 바쁘다. 휴양이나 재충전과는 오히려 거리가 멀다.


일단 짧게는 2-3일에서 길게는 2-3주마다 4-5시간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 이사를 하는 날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벌려놓았던 살림살이를 모두 정리하고 운전 중 떨어지지 않도록 모두 잘 고정해 놓아야 한다. 나와 아이들이 그렇게 캠핑카 안을 정리하고 있을 때 남편은 전기와 수도, 오수를 연결했던 관을 모두 빼고 오물통도 청소하고 캠핑카를 지지했던 지지대도 모두 정리해야 한다. 아침에 바쁘게 서둘러도 2시간이 넘게 걸린다. 캠핑장 근처엔 식당이나 마트가 거의 없기에 관광지로 나가지 않는 이상 매번 삼시 세 끼는 집밥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니 세 번의 음식준비와 설거지만으로 하루는 그냥 지나간다. 아이들은 각자 홈스쿨로 공부도 해야 한다. 물론 숙제검사와 잔소리도 필수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빨래바구니를 들고 빨래방에 가서 밀린 빨래도 한다. 이 정도면 꽤나 편안한 생활이다. 사고나 고장이 없으니까.


캠핑카에서 생활은 잔고장과 사고의 연속이었다. 처음엔 미숙해서 일어난 사고가 많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캠핑카생활이 원래 그런 거였다. 덜컹거리는 길 위에서 오래 달리다 보니 고장 나고 망가지는 것은 일상이었다. 우리도 석 달 가까이 생활을 하면서 길을 잘못 들어가서 애를 먹기도 했고, 컴퓨터 모니터가 떨어져 깨지고, 화장실 유리문이 박살 나기도 하고, 냉장고가 고장 나서 음식을 버렸다. 캠핑카를 지지해 주는 자동레벨시스템이 고장이 나서 결국 교체도 했다. 열 번도 타지 않은 새 전기자전거를 캠핑장에서 도둑맞기도 했다. 고작 3개월의 시간에 너무나도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다. 여행이 아니었다면 경험하지 않아도 될 고생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모두가 긴장하고 스트레스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지속하게 한 것은 대자연이 주는 위로도 아니었고 유명관광지의 아름다운 풍경도 아니었다. 단풍이 너무 아름다워 떠나기 싫었던 콜로라도의 마룬벨도 일주일이 지나니 내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졌다. 아무리 좋아도 평생 두근거리고 설레지는 않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늘 언제나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에게 비싼 장난감을 사주면 처음엔 부모에게 감사하고 폴짝폴짝 뛰어도 이삼일만 지나면 그 장난감은 방안 한구석에 처박히고 다른 장난감을 원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이유로 반항하는 자식과 여행 한 번 간다고 아이가 달라지지 않고 떠나간 아내의 마음을 명품백하나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사서 고생인 이 여행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매일의 삶에서 서로에게 감사와 위로를 전하는 작은 사소한 말들이나 행동들이었다. 짧게는 1-2시간 길게는 5-6시간 운전을 하는 아빠에게 늘 " 아빠 수고했어요. 고생했어요."라고 건네는 감사의 표현이었다. 처음엔 실수도 많고 서툴렀지만 이제는 캠핑카가 정차하면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을 끝내면 " 와~ 이번엔 30분 만에 정리했어. 점점 좋아지고 있어!'라고 격려하는 말이었고 매일 차려주는 집밥에 "엄마 진짜 너무 맛있어요. 잘 먹었습니다."라는 칭찬의 말이었다. 때로는 서로에게 신경질적인 말투가 나가기도 하고 언성이 높아질 때도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 내가 아까 너무 심했지? 미안해. 내가 너무 스트레스받았나 봐"라고 하는 사과의 말이었다. 이런 별것 아닌 것 같은 사소한 감사, 격려, 칭찬, 사과의 언어들이 오늘 하루를 채우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들이 여행을 시작한다고 해서 갑자기 튀어나올 리가 없다. 우린 이전에도 늘 이런 감사, 칭찬, 사과의 표현을 잘하는 편이었다. 평소 우리의 언어습관이다. 그 가치를 그전에 미처 알지 못했지만 힘든 여행가운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일상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배운다. 개인의 체력도 그랬고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잘 다니고 잘 즐기기 위해선 잘 충전하고 회복하는 게 중요했다. 어쩌면 일상에서도 잘 충전하고 제대로 쉬지 못해서 개인의 마음과 관계가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특별히 감정은 여행을 함께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달려있었다. 아무리 유명한 관광지도 그곳에서 가족과 싸우고 나온다면 거긴 더 이상 추억의 장소가 될 수 없다. 서로 불편한 마음으로 보는 경치가 아름다울 리가 없다. 반대로 함께 있어 즐겁고 행복하면 어딜 가도 재미있고 즐거웠다. 여행을 하면서 우리 가족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로스트힐이라는 작은 시골 동네이다. 장거리 운전이 힘들어서 잠시 하룻밤 쉬어간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동네였다. 장시간 운전에 배가 고파서 먹었던 맥도널드의 치킨너겟과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었고 기분 좋은 대화와 장난이 오고 갔다. 때마침 불었던 시원한 바람과 아름다운 노을이 우리 가족 모두를 무척 행복하게 했다. 그 감정이 로스트힐이라는 동네에 대한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이처럼 결국 인생도 함께 가는 누군가와의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생에 나와 함께 인생길을 가는 나의 배우자, 부모, 자녀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과의 관계가 내 삶의 질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 관계의 질은 대단한 이벤트나 비싼 선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수고했어. 고마워. 미안해. 괜찮아 같은 아주 사소하지만 절대 사소하지 않은 일상의 언어와 행동에 달려있었다.


새로운 곳을 가서 신기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보기도 하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화려하고 재미있는 곳을 경험하고 다니지만 정작 나를 지키는 것은 남편이고 아이들이었다. 그들과의 관계가 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말 한마디였다. 수고했어. 고마워. 미안해.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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