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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싫은데 여행하는 중입니다

이게 내 운명이라면 즐기자!

by 원정미


7월부터 캠핑카를 타고 캘리포니아 산호제를 떠나 네바다, 애리조나, 콜로라도를 잠시 들르고 지금은 뉴멕시코에 있다. 다음 주쯤은 다시 콜로라도를 갈 생각이다. 스키로 유명한 콜로라도에서 우리도 눈구경을 할 예정이다. 고작 이 4개 주를 여행하는데 거의 3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수십 개의 관광지와 국립공원, 유명한 놀이공원등을 거쳤다. 고등학교 졸업 후 주차티켓을 받을까 봐 대학교에서 주차장으로 전속력을 다해 뛰었던 날과 첫아이를 낳기 직전 몰려오는 진통에 심장이 터질 만큼 뛴 적 말고는 평생 고요했던 내 심박수가 산을 오르고 국립공원과 도심을 힘차게 걸어 다니느라 삼십 년 만에 세차게 뛰기도 했다.


MBTI검사를 하면 늘 90-100% 내향형으로 나오는 내가 캠핑카를 타고 미국을 구석구석 돌아볼 줄생각지도 못했다. 원한적도 없고 상상해보지 않았던 삶이다. 나를 잘 아는 가족들과 친구들은 이런 나의 선택에 다들 놀랐다. 이래서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아는 것 같다. 마흔 중반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던 시기 코로나 때문에 죽음을 실감했고 잠시 멈추어 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그 당시 죽음으로 인해 삶의 회의나 불안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남편 소원이나 들어주자!’라고.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절감했고 정말 후회 없이 살고 싶었다. 늘 나중에, 애들 다 키우고, 형편이 되면 이라고 미루던 남편의 꿈을 이루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도전을 하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여행을 다니면서 여행의 매력을 알게 되어 여행과 사랑에 빠진 이야기로 끝나면 좋을까? 하지만 반전은 없었다. 사람의 성향은 잘 변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집, 아니 이젠 캠핑카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을 가기 위해 나서는 날이 아니면 캠핑카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적이 많다. 캠핑카에서 쉬는 날은 가족들 식사준비를 제외하곤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소파에 앉아서 그림을 그린다. 아이들은 엄마가 어딘가 자리를 잡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3-4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여전히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혼자 노는 걸 좋아한다.

여행을 추억하는 나만의 방법, 뉴멕시코 열기구 축제

하지만 달라진 것도 있다. 예전엔 남편의 손에 이끌려 혹은 성화에 못 이겨 따라가 주던 여행을 적극적으로 함께 준비하고 떠난다. 그것이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나야 하는 일이건, 3시간 산길을 걸어야 하건, 1시간 줄 서서 기다려야 하건 군말 없이 한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이제 여행을 즐기는 거 아냐? 당신이 이렇게 잘 따라올 줄 몰랐어"라고 놀랄 때가 많다. 물론 나도 여행을 직접 하면서 알게 된 것도 있다. 여행을 다니면서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화면에서 보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영상은 자연의 웅장함이나 현장의 에너지를 반에 반도 담지 못했다. 때문에 어떤 곳에선 아예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찍는 것을 포기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고생스러워도 직접 눈으로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다닌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군소리 없이 따라가는 이유는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이 여행은 내가 선택한 것이고 그렇다면 끝까지 잘 책임지고 싶다. 나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은 여행경비를 부담하고 여행계획을 짜는 등의 영역도 있지만, 이 여행이 끝났을 때 이 선택으로 뿌듯하고 만족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이 여행을 충분히 누리고 즐겨야 했다. 때문에 자발성과 적극성은 필수였다.


낯선 장소에 가면 나는 여전히 긴장한다. 저질 체력으로 여행을 하다 보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허벅지가 땅기고 발가락이 아파서 늘 앉을 곳을 두리번 거린다. 거기다 예상치 못한 일들로 나를 당황하게 하는 일들도 종종 생겼지만, 캠핑카로 돌아와 잘 먹고 잘 자고 가족들과 한바탕 웃고 나면 다 별일 아닌 일들이 되었다. 오히려 여행을 통해서 일상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있다. 충전만 되면 어디든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이 여행자의 삶에 점점 적응을 하고 있다.

콜로라도의 아스펜나무를 추억하며


나의 타고난 내향성은 변하지 않았지만 뭔가 내 안에서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 생각보다 캠핑카는 별로 불편하지 않은데? 생각보다 위험한 일도 별로 없는데? 아이들이 다 크고 남편과 둘이 다니면 훨씬 더 편하겠는데? '등등 생각을 하고 있다. 심지어 남편과 '앞으로 우리 가을엔 여길 오자, 겨울엔 저길 가자'며 미래의 여행계획까지도 짜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어쩌면 미국여행의 끝엔 정말로 세계여행을 꿈꿀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겨우 4개 주를 돌고 3개월 여행을 했지만, 앞으로 내 삶에서 여행은 어쩌면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부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한다. 그 말은 '전 여행은 별로예요. 집에 있는 걸 좋아해요'라고 스스로를 단정 지었던 내가 변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세계가 이번 여행을 통해서 조금씩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면 여행을 하기로 한건 나에게 엄청난 도전이었지만 너무 잘한 결정이다. 궁극적으로 남편을 위한 여행이었지만 내가 이 여행의 최대 수혜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여행은 싫지만 계속 여행을 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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