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풋사랑
처음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 건 언제 였을까?
어린 시절 나는 연애라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은 또래 남자아이를 좋아한다며 까르르 거리며 이야기 꽃을 피웠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우리 가족, 소설책 그리고 강아지 정도였다. 나에게 있어 남자아이들이란 시끄럽게 뛰어다니며 나를 괴롭히는 그런 존재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불현듯 생겨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날부터인가 내 상상의 호수에 사랑 물고기 한 마리가 들어와 조용히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학교에 등교하면 나는 항상 책을 읽었다. 학급문고에 있는 모든 책을 읽고 나면 한 학년이 바뀌었고, 그럼 나는 또 다른 새 책들을 읽었다. 그렇게 친구보다 책이 좋았던 나에게 빈정거리는 여자아이들이 제법 있었다. 책을 읽는 게 마치 고리타분한 일인 것처럼 굴던 한 여자아이는 자신의 꿈이 가수라며 당시 최고의 스타그룹에 관한 얘기로 하루를 채우고는 했다. 하지만 나는 항상 그런 아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시했다. 나의 꿈과 즐거움은 책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플란다스의 개를 읽고 눈물을 훔치고, 삼국지 스토리에 빠져 같은 이야기를 5번 넘게 읽고는 했다. 데미안처럼 초등학생이 읽기에 어려웠던 책도 나는 읽고 또 읽었다.
13살의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일찍 등교한 나는 세계 단편 소설 모음집을 읽고 있었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며 벌레가 되는 나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뭐 읽어?"
상냥한 목소리의 남자아이였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대답하기를 잊은 채 그 아이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내가 쳐다보자 그 아이는 씩 웃으며 책 표지를 바라보았다.
"엄청 어려운 책 읽네? 대단하다! 매번 책을 읽길래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했어"
내가 읽는 책을 정말로 궁금해했던 반 친구는 그 아이가 처음이었다. 날라리 여자아이들은 조용히 책을 읽는 내 모습을 고까워했고, 내 친구들조차 책을 좋아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끌려가 놀던 중 책을 읽기 위해 집으로 도주를 하기도 했었다. 당시 테크노를 추며 킥보드를 타던 K-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이단아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나에게 진심으로 칭찬을 해주었던 그 아이, 나는 그 아이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나의 상상의 호수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남자아이. 그로 인해 나는 도무지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책을 펴둔 채 상상의 호수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그 아이와 친해지기 위한 방법을 상상했다. '내가 청소를 도와주자, 그 아이가 고맙다 말하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와 같은 오글거리는 상황을 상상해보기도 하였다. 그 아이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더 컸고, 실제로 "고마워"라 말하며 내 머리를 톡 하고 누르는 식으로 쓰다듬어 준 적이 있었다.
자리를 바꾸는 날이 되었다. 나는 그 아이와 짝꿍이 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한 법, 내가 상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 아이의 모습이 내 자리에서 아주 잘 보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책을 세워 읽는 척하며 그 아이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 아이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친구들에게 상냥했다. 여자아이들에게 못되게 구는 남자아이 투성이었던 반에서 왕자님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상냥한 성격 때문이었는지 그 아이의 별명은 '곰돌이 푸'였다. 공부와 축구를 잘했으며 여자아이들과 십자수를 같이 하기도 했다. 같은 반 여자아이들은 창문 가까이에 앉아 축구를 하는 그 아이를 응원하며 꺅꺅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며 나는 그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정을 숨기는 것이 어려운 나이 13살, 다른 여자아이들은 너무나도 쉽게 감정을 들켰고 나는 그것을 지켜보며 내 감정을 숨겼다.
11월 11일 빼빼로데이 날
나는 그 아이에게 고백을 받는 상상을 하며 학교로 향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상상이었기에, 당연히 그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많은 여자아이들이 그 아이에게 빼빼로를 선물했고, 그 아이는 아무에게도 빼빼로를 선물하지 않았다. 아쉬움을 숨긴 채 집으로 가던 하굣길에서 나는 다른 남자아이에게 빼빼로를 받았다.
"이거 남은 건데 너 먹어"
멀쩡한 빼빼로 하나를 건네주며 남은 거라는 표현을 쓰던 남자아이. 나는 빼빼로를 받으며 낯설지 않은 감정을 느꼈다. '곰돌이 푸' 그 아이가 나에게 '뭐 읽어?'라고 말을 걸어주었던 날 느꼈던 그 감정, 그것과 같은 감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 아이에게 느꼈던 그 감정이 '좋아함'이라기보다는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호감'정도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날 부로 그 아이는 나의 상상의 호수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개구쟁이 남자아이들로 가득했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 상냥한 남자아이는 정말이지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곰돌이 푸' 친구를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던 여자아이가 16명이나 됐었다. 나도 그때를 풋사랑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책벌레였던 나에게 잘 해준 유일한 남자아이.(물론 빼빼로를 준 남자아이도 착했다.) 지금도 얼굴이 생각 나는 걸 보면 정말 그 아이의 모습을 자주 상상했던 것 같다. 어렸기에 감정을 잘 몰랐고, 사랑은 더 잘 몰랐다. 잘해주는 사람에게 훅 넘어간다는 게 이런 걸까? 사실, 빼빼로를 받은 날 나는 내가 동시에 두 명을 좋아하게 된 걸까 싶어 엄청난 고민을 하기도 했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스스로의 감정을 판단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다. 상상의 호수를 가지고 있는 나는 아직도 제멋대로 설레어하고 제멋대로 상상을 해버린다.
이런 나의 제멋대로인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준 나의 남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여보, 이거 13살 때 이야기야.. 알지? 항상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