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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이령 Oct 21. 2022

상상은 곧 현실이 된다

소중한 너와의 만남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13살이었던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재잘재잘 떠들기에 바빴고, 먹성 좋은 동생은 밥 먹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던 평범한 저녁식사 시간을 바꿔놓은 건 아빠였다. 아빠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초등학생 딸들 앞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그 말, 지옥의 금기어를 무심코 내뱉었다.


"아빠가 일하는 곳 근처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이번에 새끼를 낳는다더라?" 


'강아지라니? 그것도 새끼 강아지?!' 얼핏 쳐다본 동생의 얼굴에도 '강아지는 못 참지'라는 글자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빠는 본인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발언을 한 건지 깨닫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치와와인데, 아빠가 부르면 냅다 도망가~ 웬 강아지가 낯을 그렇게 가리는지" 

"아빠 아빠! 강아지 새끼 낳으면 우리가 한 마리 대려 오면 안 돼요?"

"맞아요, 아빠! 우리가 강아지 밥도 주고 목욕도 시키고 똥도 치우고 다 할게요!"


우리 자매는 강아지라면 아주 환장을 하는 강아지 덕후였고, 아빠가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바로 본론을 꺼내놓았다. 하지만 인생의 노련함은 나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던가? 아빠는 대수롭지 않게 우리의 말을 받아쳤다.


"그럴까? 새끼 낳으면 아빠가 한 번 물어볼게~"

"와! 신난다~ 강아지다 강아지~"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의 대답은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꺼내놓은 말이 분명했다. 강아지를 데려올 마음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빠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딸이 지독한 상상병 말기라는 사실 말이다.




아빠의 강아지 발언 사건 이후부터 나는 매일같이 아빠를 닦달했다. 


"아빠~ 새끼 강아지는 언제 태어나요?"

"아빠~ 강아지 진짜 데리고 오는 거 맞죠?" 


그때마다 아빠는 그럼 그럼이라는 말로 대충 상황을 모면하고는 했다. 하지만 어렸던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강아지를 키우게 된다는 행복감에 젖어 매일같이 강아지와 함께 하는 일상을 상상하고는 했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나, 강아지와 함께 자는 나, 친구들에게 강아지를 자랑하는 나, 나의 상상 속에서는 이미 아주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상상을 하다못해 강아지와 함께 할 일상을 실제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강아지 집, 젖병, 샴푸, 발톱깎이, 빗, 개껌, 장난감까지 세뱃돈 몇 년 치를 모아놓고 한 푼도 쓰지 않았던 지독한 저축왕이었던 내가 돈을 털어서 강아지 용품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강아지 집을 사간 날의 엄마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걸 어쩌나 싶어 하던 그 표정. 어린 딸의 기대감을 깨트릴 수 없었던 엄마는 그날 저녁 아빠에게 강아지를 진짜로 대려와야 한다는 말을 건넸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나는 하루 종일 거실에서 아빠를(사실 강아지를) 기다렸다. 머릿속 상상의 호수에서는 '기쁘다 강아지 오셨네'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공부를 하는 척 거실 탁자에 앉아있었다.

아빠는 저녁 늦은 시간이 돼서야 집에 들어왔다. 그런데 아빠가 맨 몸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강아지는 어디 있지?' 순간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빠가 나를 속인 건가?' 오만가지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그때였다. 아빠는 나에게 평소에 쓰고 다니던 털모자를 내밀었다. 


"어머! 세상에나.."


아빠의 털모자 속에는 너무나 작고 아직 눈조차 뜨지 못한 새까만 새끼 강아지가 들어있었다. 그 강아지는 내가 태어나서 본 강아지 중 제일 작았고, 처음 보는 털색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상상의 호수에서 같이 뛰놀던 강아지는 TV에서 본 흰 강아지(말티즈였던 것 같다)였기 때문에 나는 그 작고 까만 강아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엄마는 쥐면 부서질 것만 같았던 그 어린 강아지에게 내가 사둔 젖병을 물려줬다. 눈도 뜨지 못한 채 손을 앞뒤로 움직이며 젖병을 쪽쪽 빠는 모습이 정말 신기했다. 그렇게 그날 강아지를 키운다는 나의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당혹스럽고 어처구니없었을 아빠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내뱉은 말 한마디에 과도한 상상을 하며 강아지 용품을 준비해버리는 딸이라니.. 하지만 덕분에 그 작고 까만 강아지는'까미'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소중한 가족이 되었다. 우습게도 까미는 아빠를 가장 좋아했고, 아빠도 까미라면 아주 껌뻑 죽었다. 아빠는 나의 상상병 말기 덕분에 소중한 개딸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까미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어느새 5년이 지났다. 아빠는 지금도 까미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이별을 받아들인 다는 것은 쉽지 않았고, 우리는 아직도 가슴속에 까미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었던, 소중한 나의 까만 강아지 까미. 오늘도 나는 까미를 다시 만나는 상상을 해 본다. 


"까미야 우리는 너를 잊지 못할 거야, 영원히 기억할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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