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역시나 목욕 시간이다. 목욕을 하기 위해 물을 트는 순간부터 나의 뇌는 상상의 호수에 빠지고, 몸은 알아서 나를 씻기기 시작한다. 그러다 한 번 씩 상상의 호수에서 빠져나온 나의 뇌가 몸에게 샴푸 횟수를 물어보곤 한다.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지독한 지성 두피인 나는 항상 샴푸를 두 번 하지만 상상을 하다 말고 갑자기 튀어나온 뇌가 간섭하는 날에는 샴푸를 몇 번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한 번인지 두 번인지 기억이 안 나니깐 그냥 한 번 더 하자" 그렇게 나는 세 번째 샴푸를 펌핑하고는 한다. 그냥 몸이 알아서 하게 맡겨두지 뇌는 하던 상상은 어쩌고 몸에 참견을 해서 샴푸를 낭비시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나는 이 이야기를 직장동료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대리님 진짜 특이하네요" 뺀질이 사원 K씨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상상이 아닌 생각을 한다. '상상을 하는 게 특이한 걸까? 다들 나처럼 사는 게 아니었나?' 생각은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생각의 종점에 도착한 나의 뇌는 어느새 뺀질이 사원 K씨를 골탕 먹이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의도적으로 한 상상은 아니었다. 어느 누가 '자! 지금부터 상상을 해보자, 시작'하면서 상상을 하겠는가, 오히려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상상해 내려고 하면 상상의 호수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로 보였던 오아시스처럼 말이다.
나는 상상의 힘이 참 좋다. 초등학생 때는 지루한 수업시간마다 꼭 상상을 했다. 물론 나의 몸이 열심히 수업을 듣는 연기를 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상 속에서 나는 가상의 친구들을 사귀었고, 하늘을 날아다녔으며, 공주님이 되기도 했다. 어린아이다운 상상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그렇게 터무니없는 상상들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여름방학 때 할머니 댁에 가면 뭘 하고 놀지, 사촌들과 어떤 이야기를 할지 이런 것들을 미리 한 편의 드라마처럼 상상해볼 때도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일들 중 실제로 실현된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적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상상에는 평범한 하루를 아름답게 바꾸는 힘이 있었다. 하굣길의 꽃내음을 더 향기롭게 만들고, 먹구름 낀 비 오는 날을 로맨틱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힘 말이다. 그랬기에 나는 상상이라는 마약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물론 내가 '상상 OUT!'이라고 결심한다고 해서 상상을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던 상상 시간은 잠에 들기 직전이었다. 항상 '엘리베이터에 나비넥타이 낀 사연~'이란 오프닝곡으로 시작하는 모 시트콤을 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 시트콤의 스토리가 만족스럽지 않던 날에는 내 마음대로 스토리를 바꿔보고 그 걸 상상하고는 했다. 10살의 어느 날에는 상상 때문에 울면서 잠을 못 이루던 날도 있었다. 초록색 거인이 나오는 옥수수 통조림 광고를 보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그 광고가 어린 나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밤 새 뇌 속에서 "호호호호 그린 자이언트~"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는 초록색 거인의 모습이 반복해서 떠올랐고, 나는 제발 잠 좀 자게 해달라고 거인 아저씨에게 빌면서 펑펑 울다가 새벽 4시가 되어서야 겨우 기절하듯 잠에 들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초록색 거인이 그려진 옥수수 통조림은 먹지 않는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더 이상 초록색 거인이 무섭지 않다. 하지만 제멋대로 상상을 하는 내 뇌는 아직도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은 어른이 된 내가 어린 시절의 나를 보듬어주는 상상을 해본다. 초록색 거인을 물리치는 영웅의 모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