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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이령 Oct 21. 2022

띠벽지와 비밀의 문

저 너머의 세상

K-어린이라면 누구나 그런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평범해 보이는 장소가 사실은 미지의 세계와 연결된 비밀의 문이 아닐까?라는 상상 말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 살던 집에도 그런 장소가 하나 있었다. 흰 벽지로 뒤덮인 벽에 딱 한 칸 붙어있던 이상한 띠벽지, 나는 그 띠벽지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균일한 방 벽에서 유일하게 조화되지 못한 채 덩그러니 붙어있는 띠벽지라니, 상상병 말기인 나에게는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존재 그 자체였다. 


'저 공간을 통해 귀신이 나오는 건 아닐까?' 

'띠벽지를 때면 모래가 쏟아져 나와서 우리 집을 엉망으로 만들지도 몰라'

'내가 잠들면 강아지와 여자아이가 그림에서 튀어나오는 게 분명해!'


본래 공포스러운 상상일수록 더더욱 멈출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띠벽지를 볼 때마다 무서운 상상을 이어나갔고, 어느 순간부터는 의도적으로 띠벽지를 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억지로 억누른 공포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법, 내 상상의 호수 속 공포 물고기는 점점 더 빠르게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저 띠벽지 너머의 세상을 직접 확인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똑똑" 주먹을 쥐어 조심스럽게 띠벽지를 두드려보았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다음으로는 송곳을 이용해 띠벽지 가장자리를 찔러보기 시작했다. 띠벽지는 송곳 따위는 우습다는 듯 벽에 견고하게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커터칼 또한 띠벽지에게는 어림도 없는 상대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띠벽지는 꼼짝을 하지 않았고, 띠벽지 속 여자아이가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나는 화가 나서 연필 뒷부분으로 띠벽지를 때리기 시작했다. "딱딱 딱딱 딱딱 딱딱" 그때였다, 띠벽지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딱딱 딱딱 딱딱 딱딱" 나는 너무 놀라 비병을 지르며 방을 뛰쳐나갔다. 


'띠벽지 너머의 세상에서 응답이 오다니!' 내가 상상했던 모든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귀신인가? 괴물인가?' 나는 다른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띠벽지 속 여자아이가 방 문을 열고 나와 나를 찾아다닐까 봐 너무 두려웠다. 그 순간 "딱딱딱딱 딱딱딱딱 딱딱딱딱" 띠벽지가 있는 방이 아닌 내가 지금 있는 방안에 그 정체불명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괴물이 이 방까지 왔나 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불 가장자리를 모아서 내 몸으로 꾹 누르며 좀 더 웅크린 자세를 취했다. 괴물이 이불 안으로 들어올까 봐 너무나도 무서웠다.


"띵동! 쾅쾅쾅 언니~"


그때 들려온 초인종 소리와 동생의 목소리,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어느새 띠벽지 괴물의 소리도 사라지고 없었다. 이불을 박차고 나온 나는 재빠르게 대문을 열었다.


"언니! 언니가 딱딱딱딱하고 벽 쳤지?"

띠 벽지 너머의 세상에서 온 동생이 배시시 웃으며 연필을 흔들어 보였다. 




어린 시절 너무나도 궁금해했던 띠벽지 너머의 세상, 그 세상의 실체는 허무하게도 옆집이었다. 방 두 칸의 오래된 작은 집, 방음이 되지 않는 건물, 옆집에 살 던 동생 친구, 그로 인해 벌어진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그때의 공포스러웠던 기억 때문인지,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저 띠벽지 사진을 보면 불쾌한 감정이 밀려 올라온다. 띠벽지 괴물인 동생은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나는 아직도 왜 저 한 곳에만 띠벽지가 붙어있었던 건지 알지 못한다. 정말로 비밀의 문이 있었던 것은 아녔을까? 해리포터에 나오는 9와 3/4 승강장처럼 말이다. 오늘도 나는 그런 아이 같은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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