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질적으로 욕구하는 존재다.
쾌락은 과연 나쁜 것인가?
인간은 본질적으로 욕구하는 동물이다. 자신과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이 욕구를 이해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나는 타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때 이렇게 질문한다.
이 사람의 욕구는 뭘까?
이 질문 하나면 자신과 타인의 대부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자각몽을 꾸려고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는 날아다닐 수 없는 인간이 꿈에서는 충분히 날아다닐 수 있다. 결과적으로 현실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욕구를 꿈이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욕구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자신의 욕구를 배척하면 절대 상대의 욕구를 파악할 수 없고, 상대의 욕구를 파악할 수 없다면 절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
특히 마음공부 하는 사람일수록 욕구를 배척하는 경우가 많은데 욕구를 배척하면서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내가 볼 때 큰 의미가 없다.
이는 대안스님과 원효대사의 이야기를 봐도 알 수 있다. 대안스님이 원효대사를 주막으로 데려가서 술상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주막을 박차고 나간 원효에게 한 말이 이거였다.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을 여기에 두고 어디서 중생을 구제한단 말이오?”
결과적으로 우리의 욕망은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이지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인 욕구를 이해하기 못하면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욕구를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쾌락이다.
쾌락이라고 하면 나쁘게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유쾌한 감정으로 즐거움을 느끼면 쾌락이 되는데, “쾌”라는 감정과 “락”이라는 느낌에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 쾌락이 과연 나쁜 것인가?
쾌락이라는 감정 자체에는 나쁜 것이 없다.
세상에 나쁜 감정은 없다. 그러니 감정을 분별하는 것은 좋지 않다. 쾌락을 분별하면, 슬픔도 분별하고, 기쁨도 분별하고, 괴로움도 분별한다. 감정을 분별하지 않아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관조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쾌락을 나쁘게 인식할까? 쾌락을 느끼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쾌락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딱 세 가지다.
하나는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타인과 나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
다른 하나는 그 쾌락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불쾌감을 느낄 경우,
마지막으로 쾌락 그 자체를 옳지 않게 여기는 개인의 신념이나 사회적 통념이다.
이 세 가지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현상계에서 충분히 즐겁게 살 수가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욕구하는 존재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욕구하는 자신을 나쁘게 바라보고, 타인의 욕구를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다. 참 자아를 찾아 고통에서 벗어나겠다고 하는 것 또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다.
내가 참 자아를 찾고자 하는 것도 본질적으로 들여다보면 나의 욕구다. 나는 다른 욕구를 줄여 참 자아를 찾고자 하는 내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중이다.
나는 왜 모든 욕구를 통제하지 못할까?
라고 자책하는 것이나, 나는 왜 새처럼 날지 못할까라고 자책하는 것이나 같다. 인간은 원래 욕구를 가지고, 잘 통제하지 못하며, 그것을 해소하면서 살아간다. 해소가 되면 즐겁고, 해소가 안되면 괴롭다. 그래서 욕구가 사라져야 괴로움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욕구를 당연하게 여겨야 그 욕구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그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그 욕구를 해소할 수 있다.
담배를 피우는 것도 욕구이지만, 담배를 끊고자 하는 것도 욕구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욕망인 것이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도 욕망이고,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욕망이고, 평온함을 위해 명상을 하는 것도 욕망이고, 영성을 위해 송과체를 열려고 하는 것도 다 욕망에서 나온다.
그 욕망이 다 사라져서 모든 불씨가 꺼지면 불을 끄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Nirvana(니르바나, 열반)가 되는 것이고, 그 Nirvana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도 욕망이다.
인간이 참 자아를 깨닫거나, Nirvana에 도달한다고 해서 갑자기 몸이 사라지거나 신이 되어 승천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욕망의 불이 다 꺼진 인간으로 살면서 윤회의 고리를 끊고 더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을 뿐이다.
나는 욕망이 다 꺼진 인간으로 살 생각도 별로 없고, 카르마에서 벗어나 윤회의 고리를 끊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냥 현상계에 내가 누릴 수 있는 많은 즐거움을 충분히 느끼면서 살아간다.
이러다 어떤 깨달음을 얻어서 욕망이 서서히 사라지다가 완전하게 꺼지면 그때는 Nirvana가 되는 것이다.
욕망을 억제한다고 깨달음을 얻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으면
자연스럽게 욕망이 줄어든다.
그러니 욕망을 줄이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맞다. 깨달음에 도달하는 수행 과정에 욕망이 방해가 되니까 욕망을 줄이라는 것이지, 근본적으로 욕망이 사라진다고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
욕망을 억제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자연스럽게 욕망이 줄어드는 것이다.
불교에서 여덟 가지 고귀한 길(Ariyo atthangiko magga, 팔정도)을 따라 지혜의 완성이라는 Prajna Paramita(프라즈나 파라미타, 반야바라밀다)를 꾸준히 실천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세 가지 근원인 Akusala Mula(아쿠살라 물라, 삼독)의 불이 점점 꺼진다. 그렇게 Prajna Paramita를 매일 실천해서 Akusala Mula가 완전히 다 꺼지면 Nivana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자신의 욕망을 사죄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면 그 죄가 사해지면서 천국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힌두교에서 내 욕구를 줄여야 참 자아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참 자아 아트만을 깨달아야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다.
즉, 단순하게 욕구를 무조건 줄인다고 깨달음에 길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욕구는,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조절하는 것이다.
욕구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사회적 가치관과 크게 상관없이 나와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고, 충족하지 못한다고 문제 되지 않는다면 그 욕망은 문제가 없다.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 것과 같다.
난 내가 주어진 환경에서 쾌락이라는 감정을 충분하게 느끼면서 산다. 원칙은 명확하다.
나와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차원에서
빠져들지 않을 만큼의 쾌락은 그냥 즐긴다.
나는 초콜릿을 정말 좋아한다. 할리스 초코를 마시고, 초코 아이스크림을 자주 먹는다. 나는 당뇨도 없고, 초콜릿을 먹고 나면 이빨도 열심히 잘 닦고, 타인에게 억지로 초콜릿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굳이 이 기분이 좋아지는 초콜릿을 안 먹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나에게 쾌락도 똑같다. 문제 되지 않는 수준의 쾌락을 누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쾌락은
단지 감정의 일부일 뿐이다.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즐기면 된다.
옷을 벗고 있으면 자유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어차피 혼자 사는 집이라 퇴근을 하면 커튼을 치고 옷을 다 벗은 채로 누워 생활한다. 모든 것들이 다 씻겨져 나가는 느낌이라 너무나 자유롭다.
이게 문제가 될까? 옷을 벗고 거리를 활보하거나, 커튼을 치지 않고 다른 집에서 볼 수 있다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니까 문제가 된다. 하지만 혼자 사는 집에서 옷을 입든 벗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결론적으로 “옷을 벗고 다닌다”는 그 행위가 문제가 되는 것이라, 그 행위로 펼쳐지는 결과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남자는 웃통을 까도 문제가 안되는데, 여자가 웃통을 까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자연적인 것인가? 사회적인 것인가? 결론은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 되는 것이 거의 없다.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뿐이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문제는 타인이나 나에게 유해성이 없으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행동을 하면
나쁜 카르마가 쌓이는 것 아니냐?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카르마를 걱정하는 사람은 카르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카르마를 제대로 이해를 하면 현생에서 쌓이는 카르마에 대한 부담감이 역으로 줄어든다. 왜냐하면 전생을 걸쳐 쌓은 카르마는 현생의 생활을 관리해서 탕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래서 우파니샤드에서 참 자아 아트만을 찾기만 하면 전생에 걸쳐서 쌓인 모든 카르마라는 부채를 한 빵에 털고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참 자아를 깨달으면 카르마에 따라 계속 다시 태어나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우파니샤드의 주된 사상이다. 인간은 전생에 걸쳐 쌓인 카르마를 일상생활을 통해 절대 탕감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카르마 편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고,
자신의 쾌락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부정하면 타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내가 굳이 고타마, 공자, 노자, 칸트, 데카르트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난 내 삶을 살면 된다.
내 삶을 살려면 나의 쾌락과 욕망을 마주하고 인정해야 내 삶을 살 수가 있다. 내 쾌락과 욕망은 남이 준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내 것이다.
그래서 난 내 쾌락과 욕망을 거부하지 않는다.
쾌락을 추구하면 나쁜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그리 좋지 않다. 왜냐하면 “추구한다” 는 말 자체가 쾌락에 빠져드는 Moha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Moha 상태가 되면 쾌락을 추구하지 못할 경우 불쾌감을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어떤 쾌락도 영원히 유지되지 않는다(anicca). 그래서 추구하지 못한 쾌락은 불쾌감으로 변하면서 감정이 나빠질 수밖에 없고(dukkha), 감정이 나빠지면 끌어당김의 법치에 따라 나쁜 현상들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을 만든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더 큰 사람은 두려움을 감당하면서 사는 것이고, 두려움이 사라졌으면 하는 욕구가 더 큰 사람은 인정을 내려놓고 두려움이 없는 평온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평온함을 추구하는 것도 일종의 욕구다. 그래서 평온함을 추구하다 보면 평온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쾌감을 느낀다. 그래서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그래서 단지 쾌락을 추구하지 말고, 느낄 수 있는 쾌락의 유해성을 잘 따져보고, 유해하지 않는 쾌락은 그냥 즐기면 된다. 그렇게 욕구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소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모든 것은 다 욕구다.
본인의 욕구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본인의 욕구다. 내가 도덕적이고자 하는 욕구, 내가 선하고자 하는 욕구, 내가 타인에게 좋게 보이고자 하는 욕구, 자신만 평온하면 된다는 욕구, 중생을 구도해야 된다는 욕구, 그 모든 것이 다 똑같은 욕구다.
Nirvana가 되려고 하는 것도 욕구다.
Nirvana에 이르고자 하는 그 욕구마저 사라지면 Nirvana가 된다. 욕구가 없으니 당연히 두려움이 없다. 더 살고자 하는 욕구조차 없는데 어떤 두려움이 있겠는가? 욕구가 사라지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래서 마음의 불이 다 꺼지면 Nirvana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욕구하는 존재다. 자신의 욕구를 거부하는 사람은 타인의 욕구도 이상하게 보인다. 타인의 욕구를 이해하지 못하면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의 욕구를 이해하면 나의 행동이 이해가 되고, 타인의 욕구를 이해하면 타인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저 사람은 왜 저런 행동을 할까?”
라는 짜증 섞인 의문이,
“아.. 저 사람의 욕구는 이거구나”
라는 이해로 바뀐다.
인간의 욕구를 배척하면 나의 내면과 타인의 행위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걸 제대로 이해하고 욕구를 마음 챙김 하면 나의 내면과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자신의 욕구를 제대로 보기 시작하면, 타인의 욕구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다. 타인의 욕구를 제대로 보는 그 시점부터 타인을 이해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자신의 욕구를 제대로 보고 타인의 욕구를 제대로 봐야,
신과 비슷한 관점으로
세상을 관조할 수 있다.
Youtube 더마프 The Magnetic Life
더 자석 같은 인생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