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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Maf Sep 20. 2023

정신(精神)은 신(神)이다.  

우리는 모두 신의 원피스(One Piece)다.


우리의 정신은 신의 한 조각이다.


우리는 정신(精神)을 가진 존재이면서도 자신이 신(神)이라는 자각을 하지 못한다. 이 세상을 창조한 주체를 창조주(創造主)라 하고, 사물을 창조한 주체를 조물주(造物主)라 한다면, 우리의 정신(精神)은 사물(物)을 창조(造)하는 주체(主)로서의 조물주(造物主)가 된다.



“나는 나의 ‘나’가 신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나는 신을 나의 생각으로 여겼다”    

- 칼 구스타프 융, RED BOOK 중에서 -



나는 칼 융이 왜 자신의 생각을 신으로 여겼는지 알고 있다. 우리의 생각은 창조적이다. 우리의 의식은 양자장을 붕괴시켜 입자로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의식이 만든 입자들을 현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펼쳐지는 모든 현상들이 내 의식이 만든 것이라는 자각이 평범한 인간을 신으로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神)이라고 하면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나 제우스와 같은 초월적 존재를 떠올린다. 왜냐하면 의식을 가진 존재는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어떤 존재를 갈망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슈퍼맨의 고향에 가면 슈퍼맨을 초월한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의식을 가진 모든 존재는 더 큰 존재의 보호를 갈망한다. 그래서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신의 한 조각(One Piece)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어지리라.”

- 요한복음 15장 -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

- 열반경​(涅槃經) -


“이것도 완전하고, 저것도 완전하다. 완전함에서 완전함이 나왔다. 완전함에서 완전함을 빼내었어도 애초의 완전함은 여전히 완전함 그대로다.”

- 이샤 우파니샤드 -



이렇듯 우리는 신의 한 조각이며, 우리의 정신은 사물을 창조하는 능력이 있다. 어떤 종교를 믿든, 아무 종교도 믿지 않든 상관이 없다.



기독교라면 우리가 포도나무인 하나님의 신성한 가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불교라면 우리가 불성(佛性)을 가졌고, Nirvana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마음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참 자아를 자신의 본질로 생각하면 된다.

과학적인 사람이라면 우리의 의식이 양자장을 붕괴시켜 입자로 만든다고 생각하며 된다.



이 작은 깨달음이 평범한 사람을 신으로 만들고, 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신의 한 조각으로 특별한 삶을 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에서 신을 찾는다. 극히 일부 사람들만이 자신의 내부에서 신을 찾는다.



자신의 내부에서 신을 찾는 사람만이

원피스(One Piece)에 도달할 수 있다.








일체유심조와 호접몽은 같은 뜻이다.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로 해석하지만, 일체유심조의 본 뜻은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마음 작용으로 보고, 이 세상의 모든 일체는 마음이 만든다.



“언젠가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다. 내 스스로 아주 기분이 좋아 내가 사람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잠을 깨니 틀림없는 인간 나였다. 도대체 인간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이 인간인 나로 변해 있는 것일까.”

- 장자 -



내가 나비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지라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일장춘몽(一場春夢)처럼 인생무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호접몽의 본 뜻은 나와 사물의 분별이 사라진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다. 즉, 내 의식이 만든 나비와 나비 의식이 만든 내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정말 심도 있게 시뮬레이션해 보면 이 두 가지의 구분은 꿈을 자각하지 않는 이상 실제로 불가능하다.


꿈을 꿈이라고 자각하는 상태를 자각몽(自覺夢, lucid dream)이라고 한다. 자각몽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심도 있게 다루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을 꾸지만 꿈을 자각하지 못한다.





나비가 내 꿈을 꾸고 있는 상태가 매트릭스의 모피어스가 준 가상현실의 파란약이라면, 빨간약을 먹고 실체로 돌아가보니 내가 작은 캡슐 안에서 갇힌 나비였더라. 당장 모피어스를 찾아가서 파란약을 구매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즉, 빨간약을 먹지 않으면 나비의 의식으로도 인간처럼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호접몽의 본질이다.



의식이 모든 것을 만든다.



우리에게 우리의 본질을 친절하게 알려 줄 모피어스의 빨간약은 없다. 그래서 대부분 그냥 파란약을 먹은 상태로 사는 것이다.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있다”는 말이나, “이 세상이 원자라는 언어로 코딩된 프로그램이다”라는 말이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원자로 코딩된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우리에게 달라질 것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빨간약은



우리의 의식이 온 우주를 구성하는

원자라는 코드에 영향을 미친다



는 것뿐이다. 이건 매트릭스에 네오가 빨간약을 먹고 나서 매트릭스에 다서 접속했을 때 모든 공간이 매트릭스 코드로 인식되면서 매트릭스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다.


정신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면 네오가 빨간약을 먹고 나서 매트릭스에 접속했을 때와 유사한 경험을 현상계에서 할 수 있다.










정신은 순수한 의식이다.


대부분이 우리의 정신을 자신의 생각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생각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은 순수한 의식이다. 우리의 정신은 우파니샤드의 참 자아(atman), 불교의 진아(眞我), 하느님의 영능(靈能), 노자의 도(道), 칸트의 순수이성에 가깝다.


순수한 의식인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몸이 아니며, 감정이 아니며, 생각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은 신체를 이용해서 현상계를 경험하고, 감정을 경험하고, 생각을 경험하는 주체다.


대부분이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생각을 들을 때 불쾌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생각대로 현상이 펼쳐지지 않을 때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나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내 생각과 다른 생각들을 적대하게 된다.


 자신의 생각과 본질인 정신을 분리시키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이나 상황을 마주해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생각이 옳다는 관념이 크게 줄어들고, 생각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아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내 정신은 내 생각이 아니다.



우리가 감정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감정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이나 감정은 정신의 한 작용에 불과하다. 감정과 생각을 자신의 본질인 정신과 분리시키면 훼손된 감정과 생각은 정신이 하는 경험이 된다.


우리의 정신이 신의 한 조각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각인이 되면 자신이 순수한 의식으로 여겨지면서 몸, 감정, 생각은 단지 경험일 뿐 자신의 본질이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에 가장 유용한 도구가 바로  

칸트의 감성화다.








순수이성은 감성화해야 한다.


대부분이 신을 떠올리면 형상화된 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교회의 십자가나 절의 불상처럼 형상화되지 않는 것은 시각화가 불가능하다. 불사조라고 하면 불처럼 타오르는 새나 원피스의 마르코를 떠올리게 되어있다.





문제는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노자의 도, 공자의 중용, 칸트의 순수이성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시각화가 불가능하다. 형상이 없는 것을 떠올려봐야 불필요한 표상만 만들 뿐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칸트의 감성화다.



“직관은 감성적일 수밖에 없다. 감성 없이는 우리에게 어떤 대상도 주어지지 않으며, 지성 없이는 어떤 대상도 사유되지 않는다.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따라서 자신의 개념을 감성화 하는 일과 자신의 직관을 지성화 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추상화’된 개념을 ‘감성화’할 것, 즉 그 감성화된 개념에 대응하는 대상을 직관에 명시할 것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개념은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다.”   

- 칸트,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



신, 참 자아, 정신, 도, 중용, 원자, 여유, 자유 등 개념만 있고 직관이 불가능한 무언가는 직관이 가능한 수준으로 감성화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감성화는 실체의 형상을 떠올리는 형상화가 아니다.


“여유롭다”는 말은 형상화가 불가능한다. 여유롭다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여유라는 의미 자체를 떠올리는 것보다 여유로운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훨씬 빠르다. 신을 감성화는 하는 것도 동일하다. 신을 감성화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의 형상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이 된 상태를 떠올리는 것이 엄청나게 도움이 된다.    


내가 신의 상태가 되었을 때 하게 될 생각의 패턴과 행동의 패턴을 떠올리고, 그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감성화다.


내가 신의 한 조각이 되었을 때 내가 느낄 감정, 내가 하게 될 행동, 내가 하게 될 생각을 지속적으로 명상해서 무의식에 각인시켜야 한다.



내가 모든 사물을 신처럼 관조한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사물을 볼까?

내가 모든 현상을 만든 신이라면 어떠한 방식으로 현상을 볼까?



신의 한 조각으로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모든 것을 창조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관조, 신이 인간 속에서 살아갈 때 느끼는 감정들과 행동들을 지속적으로 명상해서 무의식에 각인시키는 행위를 나는



신의 감성화라고 한다.



그리고 신을 감성화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의 생각을 조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자신의 생각을 조작하면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음 편의 제목은 이것이다.



우리는 생각을 조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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