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생각이 스스로를 구원한다.
감정은 생각에 반응한다.
감정은 현상에 반응할까? 생각에 반응할까?
감정은 생각에 반응한다.
현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내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인식하면 두려움이 생기고, 현상은 상당히 문제가 많은데 내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두려움은 발생하지 않는다. 현상이라는 팩트에 따라 두려움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식에 따라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고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인식능력은 얼마나 정확한가?
예전에 자각몽을 꾸다가 의식이 꿈으로 넘어가서 뇌가 폭주한 적이 있다. 그 후에 모든 사물이 전기 신호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날 새벽에 사무실로 출근하는데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너무 신기해서 거의 명상 상태로 걷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해을 때 즈음 조금 더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평소 때는 가지 않던 사무실 반대편의 복도로 발걸음을 돌렸다. 복도 끝을 지나 왼쪽으로 틀자마자 바로 앞에 귀신 보였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고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 자리에서 주저 않을 뻔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약국 앞에 설치된 연예인 등신대였다. 복도에 서 있는 광고용 등신대를 귀신으로 착각을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때 깨달았다. 귀신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귀신으로 인지를 하면 내 몸은 실제로 귀신을 본 것처럼 반응한다.
결과적으로 현상이 귀신이든 등신대든 상관이 없다. 내가 귀신으로 인식하면 내 감정은 두려움인 것이다.
타인의 감정은 내 생각이다.
우리는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인식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인간에게는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인지하는 인지 기관이 없다.
우리는 단지 타인의 생각이라고 판단되는 나의 생각과 타인의 감정이라고 유추되는 나의 생각만을 경험할 뿐이다. 대부분은 타인의 표정이나 행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유추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부정확한지 조차도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유추하는 타인의 생각과 감정은
매우 부정확하다
가끔 내가 명상 상태로 걸어 다닐 때가 있다. 불상을 보면 눈이 반쯤 감겨 있는데 왜 눈이 반쯤 감겨있는지 이 상태가 되어 보면 알 수 있다. 그냥 명상 상태가 지속되면 눈이 반쯤 감긴다. 가끔 사무실에서 이 상태가 되어 눈이 게슴츠레한 상태로 걸어 다닐 때가 있는데, 이때 나는 너무나 평온하고 기분이 좋은 상태다. 그런데 한 직원이 나에게 와서 물었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이 상태를 직원들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로 인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평소 때 생글생글 웃고 다니던 사람이 뭔가 피곤한듯한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다니니까 기분이 좋은 않은 상태로 인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매우 기분이 좋고 평온한 상태인데 타인은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좋지 않은 상태로 인식한다.
이렇게 타인이 나를 보는 인식에 오류가 있다면, 타인을 판단하는 나의 인식 또한 상당한 오류가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매우 높은 확률로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잘못 인지하면서 살아간다. 이것이 팩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그 판단에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우리는 단지 상대방의 감정이라고 판단되는 내 생각을 경험할 뿐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내 경험적 세계관에서는 타인의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은 나에게
경험이 불가능한 그 무언가다.
우리는 모두 감정의 가해자다.
우리가 만약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데 정말 많은 오류를 범하고, 그것이 실제와 같지 않다고 자각하는 순간에 이상한 시도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바로 상대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어차피 판단에 오류가 있다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오류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팀장의 기분이 상당히 나빠 보일 때
“내가 뭘 잘못했나? “
라고 생각하면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만,
”집에 뭔 일 있나? “
라고 생각하면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팀장 집에 문제가 있는 것은 내 문제가 아닌 것이다.
팀장이 무표정한 상태로 있을 때 “기분이 나쁜가?”로 인지하는 사람과 “원래 그렇지”로 인지하는 사람의 감정 상태는 같지 않다. 동일한 상황에서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따라 감정 상태가 달라진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팀장의 표정이 아니라 팀장의 표정을 해석하는 내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대부분의 가해가 타인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떤 직장 상사도 8시간 내내 윽박지르는 사람은 없다. 불가 몇 분간의 표정 변화와 말투로 하루 8시간,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괴롭게 사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 몇 분간이 아닌 나머지 일 년 동안의 가해자는 타인이 아니라 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닌 타인이 가해자라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
대부분의 정신적 가해자는 자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쉬운 방법은 생각을 조작하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
실제로 해보면 사람은 공기 중에서 스스로 숨을 참고 죽는 것이 불가능하다. 죽을 정도가 되면 알아서 기절을 시켜 숨을 쉬게 만든다. 그게 우리의 몸이다. 우리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를 보호한다.
우리의 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때 그때의 기억이 사라지거나 왜곡되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유해한 환경에서 자신을 보호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조작할 수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대부분 조작하면서 산다. 단지 긍정적으로 조작하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조작하는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며, 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긍정적인 상황조차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과,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의 삶은 당연히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은 단순하게 “긍정적으로 살아라”라고 해서 긍정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생각을 조작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다.
생각은 본질적으로 의식의 조작이다.
생각은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작하면서 사는 게 당연한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자신의 생각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유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의 생각은 원래 주관적이며, 주관적인 생각은 당연히 자신의 가치관과 환경에 의해 조작된다.
어제 회사 보고서의 본부장 이름에 오타를 쳐서 팀장에게 엄청 깨졌다. 그래서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 밥을 먹는데 어제 일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팀장도 결재할 때 발견 못 했으면서 왜 나만 가지고 뭐라 하는 거야? 본부장도 크게 뭐라 안 했다는데 진짜 짜증 나게’
표정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와이프가 물었다.
“회사에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우리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자기 합리화와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하고 사는지 하루만 제대로 파악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생각을 조작하면서 산다.
자신의 생각이 원래부터 조작된 것이며,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의지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확신이 삶을 극적으로 바꾼다.
그리고 생각을 조작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배우”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으로 사는 것이다.
인생의 시나리오를 쓰다.
직원 중에 한 명이 연극을 한다. 그 친구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쓰는 방법이 있는데, 그건 바로 특정 상황에 배역을 맡는 것이다.
만약 ‘갑’이랑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그냥 그 상황을 대본으로 받은 연기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깨달은 바가 정말 많다.
배우를 하다 보면 따귀를 맞는 역할을 맡을 때도 있는데, 신체적으로는 아프지만 그것으로 인해 실제 상황처럼 마음의 고통을 크게 받지는 않는다. “컷” 소리와 함께 상황은 종료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 배우도 따귀를 때렸지만, 그건 그냥 그 사람의 시나리오라는 것을 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시나리오의 조작이 가능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상대에게
이게 네가 받은 시나리오구나
이 생각 하나로 타인의 행동들이 나름 이해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드라마에는 크고 작은 악역이 존재한다. 현상계를 만드는 세 가지 기운 중에 방해에 해당하는 Tamas Guna(타마스 구나)가 존재해야만 현상계의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선한 역할을 맡는 세상은 22명 모두가 골키퍼조차 없는 한 개의 골대에 공을 계속 차 넣는 축구 게임과 같다. 상대편이 존재해야만 축구가 의미가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역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 악역이 있으니 일반적인 사람들이 선하게 보이는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거기서 주연으로 사느냐 엑스트라로 사느냐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꼭 주연으로 사는 것은 좋고, 엑스트라로 사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니다.
단지 자기 자신이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면 주연을 맡든, 엑스트라를 맡든 큰 상관이 없다. 자신의 시나리오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상황이 아니다. 그 상황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확신이다. 모든 상황이 자신이 만들었다는 확신이 생겨야 좋은 상황이든 나쁜 상황이든
모든 상황이 내가 만든 시나리오가 된다.
우리는 세계관을 조작할 수 있다.
내가 조작하는 세계관은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내가 만든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렇다.
내 경험적 세계관에서 나는 신과 같다.
이것이 내가 조작하는 생각이고, 매일 나에게 거는 자기 최면이다. 내가 굳이 모든 세상에 영향을 미칠 필요는 없다. 난 정확하게 내가 경험하는 세계에서만 영향을 미치면 된다.
나는 내가 경험하는 세계를 “경험적 세계관”이라고 부르고, 내 경험적 세계관에서는 내 의식이 모든 것을 창조한다는 것이 나의 다르마다.
이러한 의식이 무의식에 각인이 되면 그때부터 내 경험적 세계관을 내 의지에 따라 조작할 수 있다. 자기 암시를 내가 셀프 가스라이팅이라고 한 것도 같은 이치다.
이 경험적 세계관은 정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Youtube 더마프 The Magnetic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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