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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Jul 03. 2024

16. 유리벽 너머의 할머니

[할머니의 손] Ⅲ. 할머니가 이상해졌다

  아침이 되자마자 엄마께 연락하여 할머니 소식이 들어온 것이 없냐고 물었다. 별다른 소식 없이 평소와 같다고 했다. 꿈 이야기는 굳이 건네지 않았다. 너무 생생했기에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다고 진심으로 믿었지만, 그래도 그게 개꿈이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할머니는 가족을 당연히 그리워하고 있을 거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보고 싶을 것이다, 아마도.


  어떤 조건도 특정한 기대도 없이 존재만으로도 귀하고 아까운 사람이 내가 아니면 누군데,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세상을 뜨기 전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라도 나를 찾아올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내가 어떻게 울게 될지 그날 새벽 간접적으로 체험한 후에 나는 할머니의 임종을 구체적으로 그리게 됐다. 쪼그라든 할머니의 손, 나를 정성껏 키워낸 그 손을 잡아 드릴 거고 할머니와 여러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들 말이다. 즐거웠던 일, 속상했던 일을 나란히 늘어놓으면 할머니는 예전처럼 ‘으이구, 우리 강아지 그랬었어?’라고 정답게 반응하는 대신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이시겠지만, 할머니는 늘 그런 걸 좋아하셨으니까. 할머니 곁에 붙어 앉아 종알거리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아직은 할머니가 만지고 대화할 수 있는 형태로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장소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집에서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곳에서 말이다.


  가족들은 병원의 면회 지침을 준수하고 있었다. 면회는 ‘금지’였다. 아픈 노인들이 밀집해 있는 장소이기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합의가 있었다. 누구 하나 한 번만 뵙게 해 달라고 떼쓰거나 지침에 대하여 항의하지 않았다. 너무 점잖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할머니를 더 외롭게 했을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알게 된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어렴풋이 기억하는 그날에, 삼촌들이 우르르 본가에 방문하여 아빠와 함께 뭔가를 상의했다던가 하는 그날에 할머니의 면회가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워낙 불안정하니 가족들을 어떤 식으로든 보면 도움이 될 거라고 병원 측에서 판단했는지 유리 벽이 있는 면회실에서 할머니는 저쪽에, 가족들은 이쪽에 격리된 채로 만나 전화기로 대화했다고 했다. 삼촌 중 한 명이 그 상황 –할머니의 얼굴- 을 녹화해 두었는데 그걸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전송받았다.  

   

  그날은 내가 출근하지 않는 날이었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 있었고 몇 시간 정도 빼는 것이 어렵지 않은 날이었다. 엄마는 삼촌들이 집에 몰려오면 항상 어느 정도 긴장한 상태로 있었고 특히 두 딸이 그들과 엮여 불필요한 대화를 하는 것을 언짢아했었다. 나 또한 삼촌들이 무례한 발언을 할 때마다 가시를 돋우고 반응하여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 때가 있었으므로 그들이 있는 곳에 내 발로 걸어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그들이 아빠를 모시러 온 이유가 할머니를 면회하기 위해서였다니.     


 “엄마, 왜 그걸 나한테 말 안 해 줬어? 알았으면 나도 같이 갔을 텐데.”


  나는 애꿎은 엄마를 탓했다.     


 “너 신경 쓰지 말라고 그랬었지. 나랑 아빠가 다 알아서 할 건데 할머니 병원 신경 쓰는 거 싫어서. 애 잘 키워야지, 왜 할머니한테 신경을 써. 애기 엄마가 병원 출입하는 거 아니야.”


  엄마가 미안한 기색도 머쓱한 기색도 없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뭔가가 툭 끊겨 버리는 기분이었다. 나와 할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이 엄마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더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원망하거나 탓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엄마는 끝까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식에게까지 그 고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사람. 아픈 할머니, 아픈 아빠, 온통 아픈 사람들 틈에서 사느라 생이 지긋지긋한 사람.


  삼촌이 전송한 영상에서 할머니는 유리벽 너머에 환자 침대에 누운 채로 있었다. 수화기는 간병인이 대신 들어주고 있었다. 전화기 줄이 꼬불꼬불 엮여 할머니의 얼굴을 여러 번 건드리며 흔들렸다. 할머니가 답을 시원하게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의사 표현은 끄덕끄덕이나 도리도리,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 것뿐이었다. 목소리가 안 들렸다.


  할머니의 머리는 이전보다 짧게 잘려 있었다. 풍성한 파마를 자주 하던 분이었는데, 짧게 잘라 뽀글뽀글 말릴 머리카락도 없었다. 표정이 없었다. 자식들을 본 것이 기쁘지 않았던 걸까. 기껏 만나봤자 이렇게 유리 벽 너머로 얼굴을 보는 것뿐이라 못내 아쉬우셨던 걸까.


  아니, 무언가를 놓은 사람처럼 보였다. 귀를 댄 수화기로부터 자꾸 얼굴이 미끄러지자 간병인은 할머니의 머리를 툭 쳐서 원래 위치로 옮겼다. 그 손길이 무례해 보여 나는 순식간에 불쾌해졌다. 할머니는 머리를 제 위치로 옮기는 것조차 스스로 하지 못 했다.


  자식들은 뻔한 이야기를 했다. 괜찮으세요? 잘 지내세요? 잘 지내세요.

  누가 봐도 할머니는 잘 지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었을 거다.

  영상은 오 분도 채 되지 않는 길이였다. 간병인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할머니의 환자 침대를 밀어 퇴장했다. 그의 얼굴도 몹시 피곤해 보였다.      


  할머니는 저 때 생을 놓고 있었구나.     


  대학병원에 있던 할머니는 기운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생기라는 것이 있었다. 잘 먹고 잘 자서 낫고자 하는 의지가 보였다. ‘주님이 날 왜 이렇게 오래 살려 두시나, 얼른 데려가시지.’ 그런 말을 할 때도 할머니는 부지런히 약을 먹고 몸을 움직였고, 그래서 나는 ‘에이. 그런 말씀하지도 마셔. 건강해지셔야지.’라고 너스레를 떠는 방식으로 할머니를 응원했다. 사람이 장수하는 데에는 그런 게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많은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가족이 나를 응원하고 있다는 느낌. 그런 것들이 닻처럼 그분을 세상에 붙들어 놓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아픔을 호소해도 단번에 달려와 주는 자식이 없다면, 특별한 치료 없이 견디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면, 낯익은 가족들 말고 표정 없는 이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야 했다면, 할머니가 느꼈을 좌절과 포기가 얼마나 컸을까. 할머니는 이제는 닻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뜨게 되는지 알게 됐다.


  유리 벽 너머의 할머니라도 마지막으로 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나는 당연히 나를 닮은 아기를 데리고 함께 갔을 것이다. 귀하게 여기는 존재를 보여드리면서 할머니 마음에 온기를 심어 드리고 싶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머릿속이 화사해지며 하루를 견딜 힘이 나니까 말이다. 아이가 커 가는 것을 한번 보세요. 이제는 장난감 자동차도 가지고 놀고 할 줄 아는 말도 많아졌어요. 수화기가 없어도 나의 말은 그런 식으로 할머니께 전해졌을 거다. 할머니의 굳은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을 것이고, 그리고, 할머니는 분명 조금 더 살다 가셨을 것이다. 병원비는 너무 비쌌고 할머니가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은 많지 않았으니, 그것이 남들도 바라는 바였는지는 모르겠다. 아기 자라는 모습을 보시라며 견디는 시간을 조금씩 유예한들 할머니가 다시 건강해지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차라리 더 괴롭기 전에, 조금이라도 정신이 멀쩡할 때 가족들과 온전하고 깨끗하게 이별하는 것이 남은 가족들의 소망이었을 거다.


  누구도 할머니께 당신의 소망 같은 건 굳이 여쭈어보지 않았다. 할머니의 소망은 당연히 얼른 나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을 테고, 그게 실현될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할머니는 고립되어 있었고 너무나 외로웠고, 그래서 원치 않는 모습으로 세상과 이별하고 있었다. 이제껏 할머니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손주를 놀라게 하지 않는 부드럽고 따사로운 방식으로 그 새벽의 꿈에서 나를 찾아왔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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