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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Aug 14. 2024

18. 이상한 장례식장

[할머니의 손] Ⅳ. 흔적과 기억과 시간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는 시신을 보관하는 곳으로 옮겨졌다. 냉동 시설이 되어 있는 영안실이었다. 일 층과 이 층으로 구분된 여러 개의 네모 상자들에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죽음 후에 고인을 가족들로부터 분리하는 경험은 병원에서 아이가 태어난 후 바로 신생아실로 분리하는 경험과 비슷했다. 더 효율적으로 다음 일을 하는 데에 맞춤한 절차였다. 인생의 처음과 끝에 반으로 나누어 포갠 듯 비슷한 경험들이 여럿 쌓였다.


 직원이 할머니 몸에 덮여 있던 흰 천을 조금 내려 얼굴을 확인시켜 주었다. 가려져 있어 볼 수 없던 그 몸이 할머니였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영면 소식을 들은 지 세 시간 남짓. 이제 할머니는 지상에 얼마만큼 남아 있을까. 오랜만에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본다. 할머니는 눈을 꼭 감고 있다. 할머니 귀 쪽에 눈에 띄는 상처가 있었다. 짧게 잘린 머리카락 아래쪽으로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한 상처가. 많은 상상을 가능케 하는 흔적이었다. 요양병원의 다인실 안에서 할머니가 홀로 겪었을 일에 대하여 생각하게 했고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걸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이곳엔 할머니의 몸뿐이고, 할머니의 존엄을 지키려는 노력은 어떤 소용도 없는데. 정작 필요할 때 누구도 그걸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꼭 안았다.


 실은 평생 내게 안정감을 주던 할머니의 툭툭한 손을 잡고 싶었다. 이것이 아무 제약 없이 할머니의 몸을 만질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란 걸 알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직원은 인사가 끝났냐고 물은 후 작은 이불처럼 생긴 천을 꺼냈다. 돌아가신 분의 귀나 코에서 피가 나올 수 있으니 이걸로 압박하여 감싸 두는 것이었다. 할머니 얼굴은 앞도 보이지 않고 숨도 쉴 수 없게 가려졌다. 이후 할머니는 네모난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에는 장례식장 일 층에 있는 사무실에 모두가 모여 상품을 정해야 했다. 할머니 빈소를 꾸밀 꽃장식과 제대의 높이, 조문객들에게 제공할 식사의 종류…. 종류가 여럿 있어 어떤 것을 해야 할지 모두가 망설이고 있을 때 둘째 숙모가 말했다.     


 “우리 어머님이 항상 죽으면 푸지게 해 달라 하셨어. 뭐든 제일 좋은 거로 해야 돼.”     


 생전에 할머니와 별다른 왕래가 없었던, 성격이 너무 강하고 독특해 할머니가 불편해 마지않던 며느리였다. 가족들은 말의 진위를 가릴 정신이 없었고, 누구든 나서서 선택해 주었으면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그 말에 떠밀리듯 가족들은 그래그래, 비싼 걸 해서 나쁜 게 뭐 있겠어, 하는 심정으로 가장 비싼 ‘1호’를 골랐다. 슬퍼할 새도 없이 해야 할 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식사는 한상차림이 되도록 묶여 있는 세트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우거짓국, 육개장, 소고기뭇국, 모둠전, 회무침, 멸치마늘쫑볶음, 절편, 콩떡…. 일전에 경험해 본 조문 자리에서 내가 집어 먹었던 반찬이 어떤 것이었는지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아도, 어쨌든 육개장 대신 우거짓국이 나왔던 자리는 아직 기억하는 것을 보면 식사 메뉴를 쉽게 볼 것이 아니었다. 가장 구색이 맞고 대접한 티가 나는 메뉴가 선택된다. 할머니는 보지도 못할 화려한 꽃장식도 선택됐다.


 할머니는 진작에 수의와 영정사진을 준비해 놓으셨다. 장례 의식에 사용되는 물건 중 할머니가 골라 둔 것은 이것들뿐이었다. 할머니가 어색한 미소를 띠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액자가 준비 물품 쪽으로 분류되어 치워 졌다. 할머니의 수의는 단단한 상자 안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물품 상담을 하는 동안 직원은 자리가 부족하다며 그 상자를 자꾸 바닥에 내려놓았다. 할머니 옷이 바닥에 내려져 있는 것이 싫어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으면 조금 지나서는 누군가가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몇 번의 조용한 실랑이 끝에 사람 눈이 잘 안 닿는 테이블 쪽으로 상자를 올려놓는 데 성공하고 사무실을 나왔지만, 유족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수의 상자는 다시 바닥에 내려져 있을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할머니는 사람 옷 함부로 밟지 말라고 했었는데, 나는 할머니의 말을 지키지 못했다.


 할머니의 몸은 화장(火葬)한 이후 천주교 묘원에 안치될 예정이었다. 할머니가 다니던 성당에서 소개받아 진작부터 위치를 정해 놓은 곳이었다. 코로나로 세상을 뜨는 노인들이 많았던 때라 가까운 화장터의 예약은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예약을 잡지 못해 삼일장을 하지 못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굳이 삼일장을 고집한다면 묘원과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할머니를 모시고 가야 했다. 유족들은 상의 끝에 사일장을 하기로 했다. 상담해 주는 직원이 ‘요새 상황이 참, 화장터 스케줄에 맞춰야 된다니까요. 허허.’하며 적당히 예의를 갖추어 웃었다.

 장례식장 입구에는 할머니의 사진, 이름과 함께 유족들의 이름이 뜨는 안내 전광판이 있었다. 거기에 오를 이름을 적어서 내면 올려주겠다고 했다. 넷째 삼촌이 아들과 딸의 이름을 순서대로 썼고, 며느리와 사위의 이름도 썼다. 손자들의 이름도 쓰였다. 할머니 장례 안내문에 ‘손(孫)’칸이 있고 거기에 많은 이름이 올라가는데 내 이름이 맨 앞에 없다면 정말 화가 날 것 같았다. 이건 할아버지 회갑 때에 어떤 손자가 술을 먼저 올리느냐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삼촌이 이름 하나 잘못 쓰면 당장 소리라도 지를 기색으로 곁에 서 있었고 삼촌은 뒤죽박죽 생각나는 이름을 썼다. 내 이름 옆에 내 동생 이름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신경질을 부렸다. 이제껏 아픈 할머니께 안부 전화 한 번도 하지 않은 사촌 남동생의 이름이 내 뒤에 오는 걸 원치 않는다고. 직원이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한가 싶은 표정으로 그럼 다시 쓰라며 내게 종이를 전달했다. 그러게, 그걸 대체 남이 어떻게 알겠나. 장례식장 입구의 전광판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살았던 나와 동생의 이름이 손(孫) 칸의 가장 앞부분에 적혀 빛났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나 말고 대체 누가 안단 말인가.


 새벽이 지나고 할머니의 장례가 시작됐다. 모두 상복을 입었고 많은 조문객이 찾아왔다. 대부분은 할머니가 생전에 얼굴조차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촌 동생 두 명이 그들에게 누구와 어떤 관계인지를 물은 후 능숙하게 부의금 정리를 했다. 나는 빈소를 오가며 국화를 정리하거나 조문객에 식사를 내오는 일을 맡았다. 실로 오랜만에 대가족이 한 곳에 모였다. 어린 시절에는 명절만 되면 만나던 사촌들과 그때처럼 모였다. 각자 살아가는 모습이 조금씩 달랐고 세월을 뛰어넘은 듯 대화가 잘 됐다.


 삼촌과 숙모들을 붙잡고도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내게 할머니가 어떤 의미인지, 내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나는 사실 엄마가 날 두고 도망가거나 자살할까 봐 걱정한 적이 있었다고, 그게 아기엄마가 된 지금까지도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힐 때가 있다고. 사촌 동생들은 적당히 이기적으로 잘 살아서 좋겠다고. 할머니 아플 때는 본 척도 않았으면서 지금은 왜 나랑 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냐고. 사람들은 다 짜증 나고 다 불쌍하다고. 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으면서 뭐에 취한 듯 홀린 듯 그렇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었다.


 그로써 내가 그들과 화해했던 걸까. 평소 과묵하던 내가 속 이야기를 다 끄집어내며 울던 그 순간은 떠난 할머니가 걸어 놓고 간 마법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 장례식장은 조금 이상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이 자기 속내를 조금씩 꺼내어 놓고 그땐 그랬다고 고백하며 일종의 화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빈소 같지 않게 가끔 까르르하는 웃음소리가 터졌고, 할아버지는 무척 불쾌해했다. 나는 수십 년간 나만이 피해자라고 생각했었다. 하필이면 장손의 장녀로 태어나서 겪었던 일들과 성질 강한 할아버지와 오랜 세월 같은 공간에서 살며 형성된 성격 같은 것이 몸서리치게 싫었고, 늘 아픈 할머니와 늘 신경질이 나 있는 엄마에게서 받은 부정적 영향 같은 것들이 끈질기게 나를 괴롭혀 왔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태어남과 함께 내게 주어진 폭탄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삼촌과 숙모들이, 사촌들이 꺼내놓은 이야기에서 그들도 나름의 괴로움과 싸우며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됐고 그 점이 묘한 위안이 됐다. 내 손에만 폭탄이 들려 있었던 것이 아니구나. 다들 그랬구나. 사는 게 그렇구나.


 다음부터는 장례식장에 화기(和氣) 같은 것이 감돌기까지 했다. 잠시 쉬다 빈소로 온 후에는 둘째 숙모를 따라 할머니 영정 앞에 절을 했다. 국화도 다시 올리고 향도 피웠다. 돌아가신 분께 차리는 예의를 자주 반복했다. 할머니가 오래 몸담았던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위하여 자매님들이 오셨다. 리더 격인 어르신은 매우 카리스마가 넘쳤는데, ‘요안나 할머님 부고를 왜 이렇게 늦게 알려 주었느냐’며 유족들을 꾸짖었다. ‘코로나가….’라고 당시 모든 빈소에서 단골 대사로 나왔을 변명을 시작하자, ‘역병이 어떻든 사람 돌아가신 데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엄하게 호령했다. 그 단호하게 빛나는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자매님들은 장례 미사 책자에 나와 있는 대로 옛 성인(聖人)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고 성가도 불렀다. 하나씩 이름을 불릴 때마다 그분들이 할머니 곁에 모여드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기도가 모두 끝났을 때 할머니는 많은 성인들의 품 안에 아기처럼 안겨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할머니가 가장 바랐을 마지막이었다.


 사람들은 빈소의 할머니 사진에 대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기도를 했지만, 사실 할머니의 몸은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영안실에 있었다. 입관식을 할 때가 오자 젊은 여성 장례지도사가 빈소를 찾아와 할머니 신원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동생이 자기가 하겠다고 먼저 안치실에 올라가 있던 참이었고 나는 곧 그 뒤를 따라갔다. 네모난 상자가 열리면 다시금 할머니의 죽음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올 거였다. 상자의 문이 열렸고 천에 감싼 할머니의 몸이 나왔고 장례지도사가 묶인 천을 풀어 할머니가 맞는지를 물었다. 할머니의 얼굴은 코뼈가 내려앉은 듯 편평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는 더는 호흡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온몸을 지탱하는 힘 또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리 할머니가 맞다고 이야기하자 ‘잘 모셔드리겠다’라고 정중하고 친절하게 이야기하더니 잠시 후 가족들과 함께 올 장소를 안내해 주었다.


 약속된 장소로 갔을 때는 할머니는 이미 염습이 끝난 상태였다. 수의까지 깨끗하게 입은 다음이었다. 내가 알던 절차와 달라서 적잖이 당황했지만, 고인을 닦는 절차가 아기 목욕시키듯 부드럽게 진행되지는 않았을 거란 사실을 알기에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 같기도 했다. 나와 대화했던 젊은 여성 장례지도사와 중년 남성이 함께 있었다. 할머니 염습은 젊은 여성이 해 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되물어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가족들이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쓰던 묵주를 전했다. 중년 남성 지도사가 ‘왜 이걸 이제 주냐’며 가볍게 짜증을 내더니 ‘아, 이걸 어떻게 하지’라며 투덜댔다. 그 남성은 할머니를 싸매 놓은 수의에 가슴께를 거칠게 들추어내더니 굳은 손에 억지로 묵주를 잡아 주었다. 가족들은 그걸 지켜보기만 했을 뿐 누구 하나 말을 얹을 수가 없었는데, 행여나 그 사람의 신경을 건드려 입관 후의 할머니가 함부로 대해질까 봐 우려하는 마음이 모두 같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몸이 관에 들어가기 전 가족들이 한 명씩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당신도 데려가라고 울었다. 사촌 동생들이 왈칵 눈물을 쏟으며 할머니께 다가갈 때 나는 조금 비뚤어진 마음이 생겼다. 할머니의 근황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을, 연락 없던 손자들이 진지한 얼굴로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 우스웠다. 그들은 일종의 연극을 하는 것 같았다. 세상을 뜬 사람에게 응당 이 정도의 눈물을 쏟고 애도해야 한다는 사회적 감각을 지닌 이들이었으니 그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 같았다. 바쁘다고 그 자리에 오지 못 한 동갑내기 사촌 하나가 차라리 더 진실되어 보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숙모 하나는 닫혀 버린 할머니 귀에다가 ‘어머님,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라고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발언의 함의가 무엇일까 꽤 오래간 생각 했다. 할머니가 천국에 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 할머니의 넋을 향한 위로? 할머니께 마지막 건넬 말이 그것이라니 아무래도 할머니의 소중함은 누구에게나 같은 크기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게 씁쓸했다. 스무 명 가까운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뒤섞여 몇 초 되지도 않을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대신, 할머니를 사랑하는 순서대로 시간이 분배되었다면 나는 더 충분한 애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찾았다. 요양병원 로비에서 눈감은 할머니와 오랜만에 만났던 시점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할머니라는 존재를 ‘얼굴’로만 확인시켜 주었다. 그것이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테니까. 하지만 할머니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나무토막처럼 굳은 할머니의 등을 기억하고 할머니의 작은 품에서 풍기던 오래된 책장 같은 냄새를 기억한다. 요란하던 할머니의 웃음소리도 기억하고 음절을 늘어뜨리며 발음하던 ‘옌장’ 맞을 것들을 기억한다. 할머니의 느리고 불편하지만 차분한 걸음걸이와 할머니가 기도문을 읊던 새벽을 기억한다.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던 그 손을 기억한다. 할머니의 손은 이제는 나를 쓰다듬어 주지도 내가 쓰다듬어 주지도 못하게 수의 속에 꽁꽁 싸매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이제 나는 할머니를 이루는 모든 것들을 다시는 보거나 듣거나 만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관은 장남인 아빠와 할아버지가 덮었다. 할머니가 가고 난 후 찾아온 가족에 대한 원망과 빈소에서 느꼈던 우애 같은 것들이 그 본연의 빛깔을 알 수 없게 뒤섞였다. 한 사람의 죽음 뒤에 오는 것이 끝없는 절망만은 아니란 것에 조금은 안도했다.


 화장터로 할머니를 모시고 간 날, 이슬 같은 비가 온종일 흩뿌렸다. 화장터 직원들은 기계적으로 순서명패를 주고 유골함의 종류를 설명하고 할머니를 모신 관을 날랐다. 고작 며칠 만에 장례산업 종사자들의 무심한 모습에 익숙해졌다. 그들에게 타인의 죽음은 큰 의미가 아니란 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한참을 기다려 할머니 차례가 되자 모든 가족이 화장로 앞에 모였다. 가족들이 있는 공간과 화장로의 중간에는 두꺼운 유리벽이 있어 안쪽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화장로의 문이 열리는 소리나 불이 이글거리는 소리 무엇 하나 제대로 들을 수 없었으나, 대신 나는 엄마가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껏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못했던 엄마는 화장로의 문이 닫힐 때까지 할머니께 인사하듯 손을 흔들며 울었다.


 할머니의 묘원까지 가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으나 할머니를 모실 봉안묘 자리가 언덕 위쪽에 있어 모두가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그쯤 해서는 추적거리던 비가 그친 상태였다. 검은 상복을 입은 가족들이 일렬로 줄을 맞추어 오르막을 걸었다. 언덕 위 할머니 자리에 우묵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우리가 올 것을 알고 관리인이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구덩이 안에 할머니의 유골함과 나무 묵주를 모시고 그 위에 국화를 던져 가며 흙을 덮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려 할머니 위에 국화를 조심히 얹었는데 감히 할머니께 꽃을 던져서 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쁘고 정성스러운 것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 주어야 한다는 것도 할머니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할머니와 악수하듯 국화를 드리고 이불을 덮어드리듯 흙 한 삽도 얹었다.


 거기에서 첫 제사를 지내고 집에 오는 길에는 근교의 해장국집에 들렀다. 불처럼 뜨겁고 매운 국물을 후후 불어 함께 먹는 시간으로 할머니를 보내드리는 절차를 마쳤다. 직장에 다니는 사촌들의 복무 처리를 위하여 삼촌 한 분이 사망진단서를 수십 장 복사해서 가지고 왔다. 내가 동생들을 나이순으로 불러내어 한 장씩 사본을 나누어 주었다. 나는 휴대폰 캘린더 앱을 열어 오늘 날짜에 ‘할머니 기일’이라는 일정을 써넣고 매년 이 일정이 반복해서 뜨도록 설정해 놓았다. 동생이 옆에서 내 손을 잡아 주었다. 할머니의 몸은 당신이 떠난 지 며칠 만에 따뜻한 흙 속으로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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