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작 Jul 10. 2024

17. 그날 밤 아홉 시의 일

[할머니의 손] Ⅲ. 할머니가 이상해졌다

  한때는 단짝처럼 붙어 다녔어도 특별한 계기도 없이 멀어지는 관계가 있다. 내게는 그 동료들이 그랬다. 같은 팀에 있는 동안 각자의 고생스러움을 토로할 수 있는 꽤 좋은 관계였고 그래서 하루가 멀다고 식사를 같이하고 나들이를 가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서로가 궁금해지지 않게 됐고 만나자는 말을 먼저 꺼내기가 머쓱한 사이가 됐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로에 대한 애틋함도 흐릿해졌다고 할까. 애초부터 독점적 관계가 아니었으니 굳이 서운해할 필요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럴 때는 벌어진 일은 벌어진 대로 과거는 과거대로 남겨 두고,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 새 인연을 만들며 살아가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 나는 그 동료들의 이름과 얼굴을 늙어가는 동안 결코 잊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데 바로 그날 밤 9시의 일 때문이다. 각자의 삶을 살다가 이야기보따리를 가득 안고 만나는 것이 아직은 유효하던 때다. 그 이야기의 어느 지점부터를 풀어놓아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되던, 그래도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어 매끄러운 대화가 가능하던 때였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고 만나 늘 가던 식당 거리에 갔고 식사 후에는 커피를 마셨다. 커피 대신 스무디 음료를 주문하는 동료가 있었고 늘 같은 사람이었다. 거기에서도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밑천이 바닥날 때까지, 그래서 어떤 이야기는 두어 번 반복될 때까지 자리가 계속되었다. 인적 드문 카페의 이 층을 전세 내다시피 하여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할머니 보러 가야 할 것 같음.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는 메시지였다. 나는 짧게 ‘할머니가 위독하신 것 같다’고 상례에 걸맞은 상황 설명을 하고 모임 장소를 나왔다. 이미 하늘이 어둑해져 가는 시간이었다. 할머니의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알았는데도 이상하게 나는 차분했다. ‘위독’이라는 말에 담긴 중립적이고 전문적인 어떤 어감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이번에는 거기에 내 아기를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아기를 맡아 줄 곳을 수소문하고 나서야, 나는 할머니로 인하여 묶인 원 가족들과 함께 결코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던 요양병원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면회 장소로 쓰였을 일 층의 커다란 로비에 할머니가 낳은 자식들과 그 자식들과 결혼한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 적당히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잠정 폐쇄된 면회 장소인 데다가 밤까지 깊어가고 있었으므로 필요한 전등 몇 개를 빼고는 모두 꺼져 있었다. 벽면에 붙은 TV에서 간추린 뉴스를 요란하게 방영하고 있어 한동안 화면을 응시하기도 했으나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직원 한 명이 와서 할머니의 상태를 전했다. 한참 위독하다가 지금 잠시 진정된 상태라고 했다. 마지막 면회 이야기를 꺼내며 ‘코로나 검사를 이미 한 사람을 병실에 출입시켜 주려고 하는데, 최근에 한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직원은 그럼 간이 검사를 하여 음성이 나온 한 사람을 병실로 올려 보내줄 테니 누가 할 거냐고 물었다.


  할머니의 자식들은 상의를 시작했다. 당연히 큰형이 가셔야지. 딸이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위독하시다는데 한 명만 가는 게 맞아? 한 명 더 해 달라고 해야지. 나는 ‘사실은 내가 올라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에게까지 순서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감지하고 한편으로 비켜서 있었다.


  짧은 언쟁 끝에 장남이 할머니를 보러 올라가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여 제일 먼저 아빠가 간이 검사키트 앞에 섰다. 직원의 손길은 너무나 어설펐다. 키트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이걸 어떻게 하는 거더라 옆 사람에게 묻더니 설명서를 펴 놓고 손으로 짚어 가며 절차를 따라 하고 있었다. 면봉을 콧속에 집어넣는 것조차 어설펐다. 저렇게 하면 검사가 제대로 되나 싶은 동작들이 이어졌다. 비전문가인 내 눈에도 이 과정이 요식행위라는 것이 보였다. 방문자의 코로나 검사를 하는 절차가 필요하고 그것까지 해야 병원의 책임이 줄어들 테니까. 직원은 몇 분이 지난 후 아빠에게‘음성’이라고 선언하더니 병동으로 올라가려면 방역복을 입으라고 했다. 방역복까지 입어야 하느냐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 가족들이 한 마디씩 얹었지만 직원은 절차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아빠는 병으로 몸이 불편했다. 하나로 이어 붙어 만들어진 방역복을 혼자서 쉽게 입을 수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아빠를 의자에 앉으라고 한 후에 아기 내복을 꿰어 입히듯이 방역복을 입혔다. 아빠 손이 평소보다 더 덜덜 떨렸다. 방역 마스크와 페이스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데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동안 넷째 삼촌이 직원에게‘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생겼는데 자식 한 명만 더 올라가게 해 달라’고 회유와 압박을 거듭한 끝에 허락을 얻었다. 아빠가 방역복을 다 입고 병동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들어갔을 때 삼촌의 키트 검사가 시작됐다. 제발 빨리, 부디 더 빨리.


  제대로 된 코로나 검사도 하지 않을 거고, 원래 정해진 인원도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던 거면 대체 나는 왜 할머니를 지금 볼 수 없는 건가. 살던 집에서 깔끔하게 맞는 임종은 그려 본 적도 없다. 병원이라도 면회실이라도 인적 드문 복도에서라도 좋으니, 그저 할머니의 마지막 숨 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게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


  삼촌이 키트 검사를 받고 방역복을 꿰어 입고 있을 때 즈음 아빠가 일층으로 내려왔다. 모두가 아빠를 바라보며, ‘어머니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아빠는 파킨슨병 특유의 걸음걸이로 가족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죽었어. 죽었어.”     


  처음 들은 할머니의 사망 통보였다.     


  할머니가 짧은 수습을 한 후 일층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할머니가 몇 달 만에 병실을 벗어난다. 고모와 둘째네 숙모가 병원 로비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두 사람의 통곡이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앗아갔다. 누구라도 그만큼은 울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모는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고 했다. 그동안 수많은 세월을 함께 하면서도, 곧 할머니가 세상을 떠날 수도 없다는 걸 몇 달 동안 알았으면서도 고모는 그 한마디를 못했던 거다. 이렇게 우리는 헤어짐에 무방비하고 한편으론 어리석다.


  두 사람의 울음소리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자 아빠가 시끄럽다고 울지 말라며 호통을 쳤다. 우는 대신 소리를 지르기로 한 것 같았다. 아빠가 병실에 올라갔을 때 할머니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고 한다. 그 사실이 가슴을 옥죄이듯 아프게 했다. 가슴에서 느끼던 심한 압박감은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사방에서 눌러대며 괴롭혔다. 딱 그 정도의 압력으로 내려놓지도 터뜨리지도 못하게 하여 그곳에 묵은 것들을 오래 고이게 했고 결국은 연민인지 그리움인지 미안함인지 슬픔인지 모를 죄책감을 머금게 했다. 나는 그때 울지도 못했고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잠시 후 흰 천을 덮은 할머니가 내려왔다. 낙상 사고 후 입원했던 대학병원으로 할머니를 모셔가기로 됐다. 거기가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살던 곳, 나의 본가와 가장 가까운 장례식장이 있던 곳이었다. 대학병원 구급차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고 나는 할머니를 기다리던 일층 로비에서 얼굴이 덮여 알 수 없는 아직은 온기가 가시지 않은 그 몸에 다가갔다. 통곡하던 고모와 숙모가 할머니의 몸에 먼저 뛰어들고, 다음에는 점잖은 아들들이 다가갔고, 나의 순서는 마지막에 가까웠다. 문득 사람이 죽을 때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감각이 청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혼자서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지 그 마음을 보듬고 싶었지만 ‘할머니’라고 부를만한 존재가 지금 얼마만큼이나 지상에 남아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정말로 꼭 해야 할 말만 해야 했다. 할머니가 마지막에 붙들고 갈 만한 것 말이다. 그래서 흰 천 안에 남아 있을 할머니의 귀에 대고 그 말을 전했다.


  마지막 구급차에는 두 아들이 동행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이동했다. 할머니의 임종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는데 결국 누구도 그분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 할머니가 자신의 끝을 외롭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 나는 지금은 만나지도 않는 그 동료들과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답지 않은 농담을 나누고 언짢게 구는 상사나 후배를 욕하려고, 바쁘고 활기 있는 사람들과 더 좋은 에너지와 생기를 주고받고 싶어서, 나는 그 시간 동안 할머니를 잠시 잊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던 할머니는 결국 혼자서 세상을 떴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