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손] Ⅲ. 할머니가 이상해졌다
할아버지는 어쩌다가 식사 후 설거지 같은, 가족을 위한 ‘봉사’를 한 후에는 왜 내가 이걸 했는데 사람들이 고마워하지를 않느냐며 툴툴거리곤 했었다. 자식들이 오랜 시간 그걸 맞추어 주었기에 할아버지의 성격은 점점 더 강해지기만 했다. ‘엣헴’이라든가 ‘어허’와 같은 짧은 반응만으로도 자식들은 착착 움직여 주었다. 젊었을 때야 자식들은 엄하고 불같은 아버지가 두려웠을 것이고 장성한 후에는 괜한 말로 할아버지의 혈압을 건드려 병이라도 얻으면 그 책임을 모두 뒤집어쓸까 봐 염려했을 거다. 할아버지가 그걸 노려 가며 유아독존 식의 태도를 견지한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은 자식은 없었다.
할아버지가 일으키는 갈등 중에 우리 엄마나 할머니가 끼어 있을 때면 나는 누구보다 격분했지만, 그의 자식들처럼 별다른 말을 하지 못 했다. 나이가 들어서 내가 돈도 벌고 몸도 키도 커지면 할아버지가 함부로 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으나, 그의 자식들이 오십이 되어서까지 그러했듯 그와 부딪히거나 따끔한 한마디로 반성하게 하고 싶단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게 의미가 없을 거라는 확신도 확신이거니와 나는 다른 것도 걱정했다.
할아버지가 화가 나면 할머니가 그 화풀이를 당하기 마련이었으니까. 할아버지의 혈압도 문제였지만 할머니의 겁에 질린 얼굴을 더 피하고 싶었다. 무뚝뚝하게 묻는 말에나 대답하는 나를 할아버지는 아마도 매우 불편해하거나 건방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비겁한 건 마찬가지고, 이건 자기 혐오의 뿌리가 되는 것 중 하나라고 고백한다.
할머니가 요양병원으로 들어간 이후 할아버지의 고집은 급속도로 꺾여 갔다. 아내의 거소를 자신이 결정하거나 책임질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이 첫 번째였을 거다. 당신 또한 언젠가 건강이 기울어질 텐데, 그때 자식들이 지금과 같은 결정을 하게 되리라는 예상도 하셨던 것 같다. 사람 만나는 것과 외부 활동을 좋아하는 할아버지께 ‘갇힌 삶’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 두려워 마지않은 것이었다.
몇십 년을 함께 해 온 할머니가 이제는 같은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내가 아프게 느끼고 있던 마지막의 감각을 할아버지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평생 미워하던 분께 말이다.
할아버지가 편찮으시거나 돌아가시게 되면 할머니 때와 똑같이 슬프고 힘들까. 그럴 리가 없다고 늘 생각해 왔지만, 매일 꺾여 가는 할아버지를 보면서는 ‘어쩌면 조금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소식은 병원 직원이 아빠나 엄마, 또는 넷째 삼촌이나 넷째 숙모에게 알리는 식으로 전해졌고, 그래서 나에게까지 전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나중에야 안 사실로 할머니는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였고 그래서 엄마가 할머니가 방에 두고 간 묵주 여러 개를 챙겨다가 전달한 적이 있다.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거나 울어서 같은 병실을 사용하는 노인들에게 항의를 받았고, 그래서 어떠한 ‘조치’가 취해진 적이 있다. 이런 식이면 다인실은 못 쓰시니 일인실로 옮기셔야 한다는 제안을 받았다. 그것이 여의치 않자 할머니는 자주 재워졌다고 한다.
내가 그 말을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 들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우리 할머니 내가 책임진다며 거처에 대한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을까, 아니면 할아버지로부터 크고 작게 공격당하던 할머니를 보던 때처럼 그냥 입을 닫는 쪽을 택하였을까. 아마 온갖 육두문자를 섞어 가며 병원 측 사람들을 날카롭게 비난한 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쩌겠나’며 ‘할머니가 제발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할 뿐이었을 거다. 나는 비겁하다.
자식들도 일정 부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요양병원에 들어가신 후 얼마나 생존하실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새끼를 키우며 자기 생활을 해야 하는 자식들이 할머니의 병원비에 매달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를 만나지 못하는 기간 동안 나는 내 주변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내 방식대로 해석하며 할머니의 상태를 점쳤다.
예를 들어 내가 쓰는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거나 깨지면 그건 할머니께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으로 보았다. 그럴 때면 엄마께 전화하여 혹시 할머니 소식 들어온 것 없냐고 물었다. 엄마는 ‘그냥 똑같다고 하신다’고 말했고 그중 절반은 거짓말이었다. 엄마가 이 상황을 바라보는 태도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같았다. - 너한테까지 이 부담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다. 네가 할머니를 아끼는 것과는 별도로 이 모든 짐은 우리 대에서 알아서 할 거고 너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으면 한다. 아기 데리고 면회 다니지 말아라. 고생은 이제껏 내가 다 해 왔다.
엄마는 당신이 겪은 힘든 일 덕에 자녀들이 잘 되리라고 생각했었다. 괴로운 일은 본인이 다 하고 자녀들의 고통까지 다 가져가서, 나와 동생 앞에 승승장구하는 삶만이 남으리라고 믿었다. 나는 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상황을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정신승리만 하려는 비겁함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점차 뭔가 꺼림칙한 일이 생기면 내 가족, 특히 내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그것이 면제되리라는 생각을 나도 하기 시작했다. 아직 아이가 어려 그걸 적용할 만한 것들이 일상을 침범하기 전이었으므로 나는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이어 생각했다. 내가 곤란하거나 불쾌한 일을 겪게 되면 그걸 하필 내가 겪었기에 할머니에게는 그런 일이 면제되리라고 점치고 진짜로 믿었다. 직장에서 곤란을 겪은 날에는, 그래도 오늘은 할머니께 큰일이 없었겠지 안도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추후에 전해 들은 할머니의 상황과 비교하면 내 물건들은 너무 온전했다. 직장에서 쓰는 텀블러는 어찌나 튼튼하게 만들었는지 몇 번씩 바닥에 떨어져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노트북처럼 고가의 물품은 내가 알아서 잘 챙겨서 바닥에 떨구거나 고장 내는 일이 없었다. 자잘한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도 없었다. 직장의 업무 자리가 외부 출입하는 길목에 있어 물건에 손이 탈 가능성이 많은 상황이었지만 누군가가 급해서 가져간 물건은 언제고 제 주인을 다시 찾아왔다.
작업을 몇 번씩이나 검토하는 강박적인 성격 탓에 결재 서류에 문제가 생긴다 해도 나만 알고 타인을 알 수 없는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 생겼으며, 아무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았다. 직장 일과 사적인 일을 철저히 분리해 왔기 때문에 나의 불안을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힘든 일이 이어진다고 해도 일주일을 넘지 않았다. 나의 삶은 비교적 멀쩡했다.
나는 멀쩡했고 할머니는 고통스러웠다. 나 때문에 할머니가 고통스러웠던 걸까. 할머니가 고통스러워서 내 삶이 안전했던 걸까. 할머니의 고통은 격리된 장소에서 직접 겪어야 하는 것이었다. 생애 마지막에 오는 고통은 실로 혼자만의 것이다. 할머니는 이런 방식으로도 내게 인생을 가르쳤다.
3월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나는 혼자 침대에 왼쪽으로 돌아누워 자고 있었다. 잠자는 자세까지 알 정도로 절반 정도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꿈이 진행됐다. 내가 선잠을 자나보다 생각했다.
갑자기 할머니가 가까운 곳에 오신 것 같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가 어떻게 여기 계시지? 나는 할머니를 여러 번 불렀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가 ‘네 뒤에 있어.’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으나 눈앞에 반짝이는 은색 이미지의 벽이 보였다. 뭐야, 우리 집 냉장고 문 같은 색깔이네. 그 시점에서 엉뚱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뒤에 있다 하니 돌아눕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예 일어나 볼까 했지만 꿈이 끝나면 안 되니 잠이 깨어서도 안 됐다. 터널에 들어간 것처럼 색깔 있는 빛들이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할머니는 어떤 감각으로만 남아 있었다. 할머니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어 나는 외쳤다.
“할머니, 사랑해! 사랑해!”
잠에서 깼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아기를 안고 많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