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손] Ⅲ. 할머니가 이상해졌다
나는 할머니가 점점 나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때 할머니가 빙판길에서 미끄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한겨울 바깥출입을 편하게 하지 못하여 집에만 있는 일이 많았고 그래서 무척 답답해했다. 짧게라도 바깥바람을 쐬어야 머리가 아프지 않다던 할머니는 약국을 찾듯이 현관문을 열었다. 아마 그날도 할머니는 그런 마음으로 위험천만한 겨울 산책길로 나갔을 것이다.
몰려오는 두통에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할머니는 거실에 있는 불편한 의자에 앉아서 내게 인사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놓칠까 봐 급하게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갔고 그제야 할머니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게 됐다. 돌아가는 길에는 늘 그랬듯, 할머니는 저런 표정을 짓다가도 금세 좋아질 것으로 생각했고 다음번 방문 때는 멀끔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다시 나를 반겨주리라고 믿었었다. 수십 년을 반복해 온 패턴은 내 몸과 마음이 동시에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래 입원 중이던 할머니의 얼굴은 어땠을까. 병원 다인실에서 옆자리 할머니와 과일도 나누어 먹고 가벼운 농담이라도 주고받을 수 있으면 그게 할머니의 ‘원래 모습’에 더 가까울 것일지도 몰랐다.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만은 아니길 바랐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마지막 얼굴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만 같은 실내 생활에 숨이 막혀 노랗게 뜬 그 얼굴이라면, 현관문을 쾅 닫던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 미안했지만, 그보다 더, 나를 향한 혐오감을 걷어내고 싶었다.
할머니는 대학병원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겨 가기로 했다. 노년의 삶에 대하여 문외한이었던 나는 요양병원과 요양원의 차이도 알지 못했다. 내게는 ‘지인이 그곳에서 일하여 필요한 소식을 신속하게 받아 볼 수 있다’는 넷째 숙모의 말만이 현실로 다가왔다. 자기표현이 잘 안 되는 어린이를 처음 기관에 보낼 때 선택기준 첫 번째가 믿을 만한 지인의 추천이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인생 구석구석에서 그런 것이 빛을 발했다.
할머니는 아직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고 간호가 필요했기에 요양원이 아닌 요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었고 그곳에는 주·야간 간호 인력이 상주하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에게는 더는 휴대폰이 필요하지 않게 됐다. 거기에서 일하는 분과 할머니의 자식들이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 전화로 문자로 대화할 거였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 요양병원을 포함한 모든 의료기관에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던 때였다. 여기 역시 면회가 금지되는 곳이라고 했다. 게다가 나는 어린 아기를 키우는 중이라고 할머니가 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던 때부터 면회 기회를 원천 차단당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할머니 얼굴을 언제 마주 볼 수 있지? 통화 말고 직접 만나 손을 맞잡고 얼굴 부비는 것을 대체 언제 다시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애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마지막’의 감각을 더했다. 이 기회가 아니면 안 될 것 같고 이번이 아니면 영영 후회하게 되리라는 직감.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들어가는 날에는 구급차를 쓴다고 했다. 요양병원 구급차로 할머니를 실어 바로 입원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이다. 구급차는 공간이 좁아 여럿이 탈 수 없고 할머니와 넷째 삼촌이 함께 이동하기로 했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나는 구급차에서 내려 병원 출입구로 들어가는 모습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울 도로 사정 때문에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도착하는 시간을 특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차에 태우고 요양병원 주차장에 한 시간 먼저 가서 할머니를 기다렸다. 겨울 추위에 아이도 나도 바싹 얼어 있었다. 한참 여기저기 탐색하는 것에 빠져 있던 아이는 내 손을 잡고 주변에 보험이나 간병 같은 글자가 쓰인 홍보 패널로 달려가 손가락으로 짚어댔다. 네가 이 단어를 뼈아프게 알게 되는 날까지 나의 생존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는 무력한 생각을 했다. 앓다가 죽는 삶은 단 한 번도 바라본 적이 없다. 왜 인간의 대다수는 아픈 채로 죽게 되는 걸까.
대학병원을 출발했다는 메시지를 받았고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급차가 주차장 쪽으로 들어왔다. 나는 느리게 걷는 아이를 들쳐 안고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 사람들은 너무 빨리 일했다. 할머니가 짐처럼 뉜 환자 침대에서 바퀴를 내리고, 그분의 머리가 길의 요철 때문에 쿵쿵 움직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상 출입구로 할머니를 빠르게 실어 갔다. 모든 이유는 코로나 때문이랬다. 올 때까지만 해도 할머니와 충분히 인사할 줄로만 알았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나는 오늘 꼭 할머니를 봐야 해! 우리 아기도 할머니한테 보여드려야 해. 할머니가 저기 들어가면 이제 다시는 못 볼 것 같단 말이야.’
할머니를 향해 달려갔다. 내가 뛰니까 내가 안은 아이도 덜컹덜컹 흔들거렸다. 할머니가 환자 침대 위에서 그렇게 흔들렸듯이.
“할머니!”
내가 큰 소리로 부르자 할머니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왔어요! 애기도 왔어요!”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여기를 보았다.
입원 절차의 원칙상 가족들 간의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어린 아기까지 동반한 나의 간절함이 전해졌는지 직원이 할머니의 침대를 잠시 멈추어 주었다. 한겨울 칼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부는 가운데 나는 드디어 할머니와 마주 볼 수 있게 됐다.
할머니는 아기를 보고 싶어 했다. 내가 몸을 돌려 아기를 보여 주었고, 분명 아기도 할머니를 보면 반가워서 배시시 웃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낯선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진 아기는 할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사방을 관찰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 하는 아기를 왜 요양병원 같은 ‘불길한 곳’에 데려오느냐는 말이 여러 어르신의 중론이었으나, 그때 아기를 데리고 갔던 것에 후회는 없다. 할머니가 부드럽고 톡톡한 아기의 등을 만지려다가 금세 손을 내리고 ‘아기 얼굴 좀 보고 싶다’며 아쉬운 마음을 말했다.
정작 할머니와 마주 보았는데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작별의 인사를 하기에는 나만 느끼고 있는 어떤 감정을 할머니에게 퍼붓는 꼴이 될까 봐, 그래서 할머니를 더욱 편찮게 할까 봐,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대신 할머니를 안거나 손을 꼭 붙잡는 식으로 마음을 표현했었는데 침대에 묶이다시피 한 할머니께 그걸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켜보는 사람이 많은 가운데 할머니께 나의 말로 사랑한다고 전한다면 굉장히 멋쩍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거르고 걸러 한 마디를 정했다.
할머니는 치료를 위해 그곳에 옮겨 간다고 알고 있던 터였다. 대학병원 입원비가 너무 비싸서 좀 더 저렴한 곳으로 옮긴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할머니는 그게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단번에 그러자 했을 것이다. 자식들에게 폐 끼치는 것을 항상 미안해하던 할머니였으니까. 할머니는 이곳에서도 가끔 한 명씩이라도 면회를 들어와 잠시라도 말벗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몇십 년간 그래왔듯, 완벽하진 않아도 거동할 수 있게끔만 몸이 회복되면 익숙한 그 집으로 돌아 가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전부 불가능하다는 걸 모두가 아는데 할머니만 몰랐다. 나 역시 거짓말을 섞어야 했다. 나의 마지막 말은 진실을 뺀 진심을 전하는 인사가 되어 버렸다.
“할머니, 잘 있다가 나와요. 나와서 다시 봐.”
할머니가 입구 안쪽으로 사라지고 대표 역할을 하던 넷째 삼촌만이 출입 허가를 받아 행정처리를 하러 갔다. 사이렌 끈 구급차가 여느 자동차처럼 주차장 한편에 얌전히 서 있었다.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사방이 고요했다. 주차장에 남은 가족들은 서로 나눌 말이 없었고 오늘은 바쁘니 다음 행사 때 보자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배운 나는 시한부를 선고받고 마지막 여행을 떠나거나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장소에서 삶을 정리하는 인물들을 만나왔다. 죽음을 예고받을 수 있다면 삶을 정리할 기회도 얻을 수 있을 테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내가 그려왔던 생애 마지막은 다 틀렸다. 할머니의 마지막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아프고, 속고, 무력하고, 숨 막히고…. 할머니가 생애 마지막에 간 곳은 면회가 금지된 요양병원의 다인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