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손] Ⅲ. 할머니가 이상해졌다
할머니가 아직 건강했을 때, 대책 없이 자라는 흰머리를 할머니는 숨기고 싶어 했다. 할머니는 시장에서 염색약을 사 와 안방 화장실에서 염색하곤 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도왔다. 하지만 그 도움의 현장은 꽤 거칠었고 할아버지는 전혀 꼼꼼하거나 다정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메리야스만 입은 채 화장실에 쪼그려 앉으면 할아버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반쯤 앉아 할머니의 뒤통수를 잡았다. 그야말로 머리채를 잡았다. 모가 거칠어진 오래된 칫솔을 염색용 솔로 사용했고 염색약 냄새는 너무 독했다. 할아버지는 있는 힘을 다해 칫솔을 박박 문질렀다. 할머니의 두피까지 까맣게 물들었고 이후 며칠간은 이마나 귀에도 검은 물이 들어있었다. 이런 장면은 할머니가 검은 머리를 포기할 때까지 지속됐다. 흰머리로 덮이는 면적이 넓어지자 할머니는 희고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을 노인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꾸었고, 안방에서 독한 염색약 냄새가 사라졌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남긴 잔해들, 먹고 남겨 둔 귤껍질이나 내용물이 말라붙은 컵, 뭔가 실험을 하고 남겨 놓은 찌꺼기들을 줄기차게 치웠다. 술 취해 뻗은 할아버지의 양말을 몇십 년 동안 벗기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할아버지가 밖에서 하는 일들을 눈감아 주었다. 독불장군을 견디었다. 두 노인은 그런 식으로 서로를 돌보았다.
마지막 입원일에 할머니는 익숙하게 병원복을 갈아입고 링거를 꽂았을 것이다. 다인실 한 편에 할머니의 침대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늘 하던 절차대로 할머니는 입원 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 병원 접수는 할머니의 장남과 맏며느리, 또는 넷째 아들 내외가 도맡아 했다. 할아버지는 정신이 맑고 정정한 분이셨으나 할머니의 입원 절차까지 도울 수는 없는 구십 대 노인이었다. 함께 살고 있어 할머니의 부상을 가장 먼저 인지하는 자녀가 아빠였고 그 아내인 엄마가 초기 대응에 동행했다. 아빠가 은퇴한 이후로는 더욱 당연한 듯이 그의 몫이 됐다. 넷째 아들은 장남 다음으로 할머니 가까이 사는 자녀였고 부모에게 일어난 일을 모르쇠 하지 않는 착한 심성을 갖고 있었다. 넷째 아들의 아내도 내편 네 편 가르지 않는 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인 데다가 건강과 투약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며느리였던지라 늘 그다음 순번으로 방문했다.
자녀가 여럿이어도 할머니의 입원 생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집이나 직장이 멀다는 이유로, 또는 지금 책임져야 할 다른 일이 있다는 이유로 한 발자국 뒤에서 할머니를 지켜보는 자녀들이 더 많았다. 할머니는 다산이 축복이자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세대의 한 사람이고 그들에게 다산은 곧 안온한 노후와도 연결된 개념이었을 것이나 그건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렸다. 여럿 낳은 자식 중 할머니를 케어하는 자녀들은 정해져 있었다. 그나마도 할머니가 아팠다가 나았다가 하는 날들이 길어지면서 헌신적이던 자녀들도 조금씩 변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녀들도 분명 있었을 거다. 그마저도 없는 노인들이 수없이 많을 테니 할머니는 늘‘복 받은 노인네’라는 평을 들었다.
그 겨울 할머니가 다치던 때에 장남인 아빠는 이미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서서히 얼굴과 몸이 굳고 쪼그라드는 병. 진단을 일찍 받은 덕에 인터넷에서 찾아본 온갖 증상들이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나 아빠의 얼굴이 점차 표정 없는 가면처럼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아빠의 병증은 회복이 불가했다. 악화하는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것 외에는 치료라고 할 것이 없었다.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던 사람이 운전대를 놓았고 퇴직 후 그의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졌던 취미인 카메라도 놓았다. 몸이 쪼그라든 아빠는 마음도 함께 쪼그라들었고 극심한 우울 증세를 보였다. 아빠의 병명도 증상도 명확히 모르는 할아버지는 그를 ‘한심한 아들’로 여겼다. 가족들은 모두 늙은 아들의 병증을 그보다 더 정정한 아버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했다. 구십 넘은 아버지가 칠십 넘은 아들을 윽박지르고 혼냈다. 왜 이렇게 굼뜨고 왜 이렇게 한심하냐고 말이다. 아빠는 늘 그랬듯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침묵했다.
할머니 병증의 초기 대응은 그런 아빠가 해야 했다. 한집에 사는 공식적인 보호자로서 말이다. 과거라면 집안의 대소사에 대한 의무와 함께 권한과 재산까지 함께 물려 왔겠으나, 아빠에게는 오로지 의무만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에서 대책 없이 늙어 간 노인 내외에게 재력이라 할 것이 없었고 그나마 있는 것조차 아들 다섯에게 이모저모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며 현대적인 공평이란 그런 데에서만 빛을 발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나는 항상 화가 났다. 아무런 능력도 갖추고 있지 않으면서 모든 권한을 쥔 것처럼 행동하는 할아버지와 아무런 권한도 갖추고 있지 않으면서 모든 의무를 지고 있는 나의 부모가 극명하게 대비됐다.
장남의 일은 곧 맏며느리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병원을 알아보고 입원 절차를 밟고 보호자로서 의사를 만나는 일을 했다. 엄마는 입원 기간에 필요한 물품들을 빈 종이에 적었다. 두루마리 휴지, 종이컵, 수건, 양말, 비누…. 여행 짐을 꾸리는 것처럼 필요한 것들을 한가득 쓰고 장을 봤다. 엄마는 입원실 안에서 할머니가 신을 실내화로 뒤꿈치가 터진 슬리퍼 대신 학생용 실내화를 샀다. 펄떡거리는 슬리퍼를 신으면 걸려 넘어지기 쉬워서였다. 마트에서 파는 학생용 실내화에는 그때그때 유행하는 캐릭터들이 장식품으로 붙어 있었다.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은 흰 실내화가 가장 저렴했지만, 엄마는 몇천 원 더 비싸도 할머니의 발에 딱 붙어 있을 법한 실내화를 골랐다. 당겨 붙일 수 있는 밸크로가 붙어 있어 발등에 밀착시킬 수 있는 학생용 실내화였다. 고정 찍찍이 위에는 작게 그린 펭귄 캐릭터와 함께 PENGSU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엄마는 할머니의 성경책과 묵주도 챙겼다. 그 또한 할머니의 생필품이었으니까. 사 온 물품을 장바구니에 꾹꾹 눌러 담은 다음에 엄마는 택시를 타고 할머니가 있는 병실로 갔다.
입원 초기에 해야 할 일들이 대략 마무리가 되면 자식들이 하나둘씩 병원으로 찾아왔고 그제야 대충 역할이 분담됐다. 간병인이 구해지기까지 자녀들은 스케줄을 짜서 간병했다. 아빠의 동생들과 그 아내들 또한 육십 넘어 노년에 접어들어있었다. 간병인이 구해지고 나서야 자식들은 한숨 돌릴 수 있었으나, 아예 간병인에게 모든 걸 전담시킬 수는 없어 수시로 병원에 드나들어야 했다. 엄마는 ‘이 고생은 그냥 나한테서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커서 내가 할머니 면회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했다.
할머니의 마지막 입원에서 하필이면 몹쓸 전염병이 온 세계를 휩쓸어 버린 터에 면회 자체가 쉽지 않았다. 멀쩡한 사람이 대학병원에 드나드는 것은 금기시되었고 보호자 출입카드는 단 하나뿐이었다. 늙은 자식들은 입원한 할머니를 자주 보러 올 수 없었고 줄줄이 딸린 손주들 또한 자기 일을 할 뿐 할머니를 굳이 떠올리거나 챙기지 않았다.
엄마에게도 손주가 있었다. 내가 일을 하러 간 동안, 전염병 위기 단계가 격상하여 갑자기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게 되거나 아기가 열 감기라도 걸릴라치면 엄마가 동원되곤 했다. 아이가 아플 때마다 갑작스러운 휴가를 낼 수 없는 내 탓이었다. 엄마 말고는 기댈 데가 없어서 나는 엄마가 겪는 일들을 애써 모른 척하고 아이를 맡겼다. 할머니의 입원 이후 엄마의 이중고가 시작됐다. 사이클이 맞았어야만 했다. 엄마가 병원을 방문하는 일정과 내 아기의 어린이집 휴원 기간이 적절히 어긋나서 둘 다 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퇴근을 좀 이르게 해서 아기를 전담할 수 있을 때 엄마가 할머니 면회를 갈 수 있도록 일정이 착착 돌아가야 했다. 그중 어떤 조각 하나가 뒤틀리면 와르르 무너질만한 일상이었다.
아빠는 고꾸라지는 몸을 하고도 할머니를 곧잘 돌보았다. 아빠의 병증 중에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증상이 있었는데 그 손으로 할머니를 부축도 하고 원무과 면담도 잘했다. 아빠를 지탱한 것이 그의 정신력이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종종 할아버지도 할머니를 찾아갔지만 실은 그런 방문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아픈 이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광경을 할아버지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오랜 시간 품을 들여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할머니의 부재 이후 할아버지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돌보았다. 여전히 좋은 것을 찾아 먹고 매일 운동을 했다. 할아버지가 생과 건강에 대해 갖는 열정과 집착은 대단했다. 자녀와 손주들을 비롯하여 그를 둘러싼 모든 가족 중 그만큼 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자주 다투었지만,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늘 윽박지르고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달래는 쪽이었지만, 할머니가 입원해 있는 동안 서로를 무척 보고 싶어 했다고 했다. 누가 봐도 악연 같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래서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민망하다는 느낌과 함께 기가 찼다. 그리움은 적어도 상대에 대한 존중이나 사랑 같은 것들이 선행된 후에 촉발되는 감정 아닌가. 이제껏 보아 온 두 분은 낭만적 사랑이라 부를만한 것들을 주고받지 않았다. 권위에 따른 순종과 일방적인 윽박지름과 얕봄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겠는가.
두 분의 사랑을 용인할 수 없던 나는 대체어로 ‘정’이란 것을 떠올리며 그들을 이해하고자 했다. 수십여 년 동안 같은 방을 쓰고 같은 풍경을 보며 살면 쌓이는 것. 타박과 다툼과 한탄과 눈물과 돌봄이 팔십여 년간 축적되어 만들어진 것. 자타 구분 없이 한 몸뚱이처럼 생존하는 것. 그래서 제삼자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이완된 상태로 그들은 살아왔던 것 같다. 그리고 서로에게 든 지긋지긋한 미운 정을 긴급히 수습해야 하는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고 싶다’는 남사스러운 표현을 자식들까지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내어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본 노년이었다. 온통 늙어버린 사람들이 서로에게 매달린 채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