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작 Apr 03. 2024

10. 같은 일을 겪는 사람들

[할머니의 손] Ⅱ. 나를 이룬 것의 팔할

 결혼하고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를 상상할 수 없었다. 대놓고 말하면 나와 부딪힐 것이 분명하니 할머니는 매일 새벽 기도를 하는 식으로 증손주를 기다렸다. 당시에는 아이 없이 살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주변 친구들과는 흔하게 나누던 고민이었지만 할머니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사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그 세대가 택한 삶의 방식 외에는 상상할 수 없는 어른의 말은 조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깊은 고민을 나눌 대상에서 할머니는 완전히 제외되었다. 대놓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깊이 걱정하는 분위기가 감도는 친정집에 다녀올 때마다 녹초가 되곤 했다. 자아 성찰이나 소망과는 무관하게 해야 할 일들이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언젠가 말했듯이 ‘사람이 태어났으면 자식을 낳아야 하는 법’이었다.


 어차피 낳을 거면 한 해라도 먼저 낳자는 생각으로 결국 아이를 가졌는데 난 그걸 할머니께 말하기 싫었다. 할머니가 한평생 해 온 일에 무력하게 합류하는 느낌이었다. 할머니, 엄마, 이모, 고모, 사촌 언니…. 그 길을 먼저 간 어떤 여자에게도 임신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임신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처음 산부인과 병원에 가던 날, 나는 다른 사람 말고 내 여동생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콩알만 한 점 하나가 찍힌 초음파 사진과 함께 ‘축하합니다’라는 말을 듣고서, 나는 그게 뱃속에 생긴 아기란 걸 대체 알아볼 수도 실감할 수도 없었지만 ‘감사합니다’라고 답하고 나왔다. 엄마에게만 전화하여 아기가 생겼다고 전하고, 흔히 들어본 적 없는 높은 톤으로 축하 인사를 받은 후에도 나는 왠지 할머니께만은 이 말을 전하기가 어려웠다. 할머니는 왠지 내 앞에서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고, 그건 너무 낯 간지러운 일이었다. 결국 할머니는 건너 건너 나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고 ‘여태껏 몰랐었네. 어이쿠, 내 새끼가 아기 가졌네’하고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눈물도 감정 과잉도 없는 편안한 피드백이어서 일순간 머쓱해졌다. 알리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제 낳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 고모가 모두 했던 일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면 될 것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뭔가를 해 주고 싶어 했지만, 쇠약해진 몸 때문에 많은 걸 할 수는 없었다. 입덧이 심하지 않으면서도 식욕이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할머니는 매일 뭐 먹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다. 정말로 없다고 말해도 질문은 계속됐다. 할머니는 그런 내가 이해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따금 커피나 라면 같은 음식이 당겼다. 그런 걸 먹는 것도 할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친정에 간 날, 할머니는 오늘만큼은 반드시 뭐라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푸지게 한 상을 차리기에는 기운이 달리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냉장고에 보관된 반찬만을 툭툭 꺼내 투박한 상을 차리기에는 마음이 아쉬워, 할머니는 정말 오랜만에 주방 조리대 앞에 섰다.


 할머니는 밥솥에서 따끈따끈한 쌀밥을 푸고 식용유 두른 프라이팬에서 달걀 프라이를 두 개 만들었다. 조미김을 뜯어 반찬 접시에 옮기고 내가 좋아할 만큼 푹 익은 김치를 썰어 식탁에 올렸다. 중학교 다닐 때 내가 자주 먹던 밥상이었다.     


 “이거 다 먹고 가, 알았지?”     


  할머니는 내 맞은편에 앉았고 나는 밥을 푹푹 떠서 먹었다. 할머니가 만든 달걀 프라이는 가장자리 부분은 바삭바삭하면서 노른자는 반숙으로 익어 정말 맛있었다. 최고의 달걀 요리였다. 식용유를 조금만 쓰면서도 그렇게 바삭바삭한 테두리를 만드는 것이 늘 신기했었는데, 오랜만에 만드는 달걀 프라이에도 그 솜씨가 고스란히 살아남아 있었다. 김치도 잘 찢어 밥에 올리고 조미김으로 싸서 먹었다. 적지 않은 밥공기에 들어있던 쌀밥이 금세 동이 났다. 임신했다 해도 노쇠한 할머니보다는 몸 쓰기가 훨씬 편했을 텐데, 나는 어렸을 때처럼 가만히 앉아 할머니가 차려 주는 밥상을 쏙쏙 받아서 먹었다. 할머니는 내가 반찬을 모두 비우는 것을 끝까지 보고 빈 그릇들을 모아 설거지했다. 애처럼 굴고 어리광 부려도, 틱틱 대거나 무례하게 굴어도 늘 그 자리에 있는 할머니를 보고 싶었다.


 할머니는 보름달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르는 내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곤 했다. 할머니가 다섯이 넘는 아기를 가지고 낳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해 왔을 행동이었다. 너무 많이 걷지 말고 항상 조심하며 다니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할머니의 엄마나 언니들에게서 들었을 말들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항상 조심하고 많이 걷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커피를 진하게 타서 할머니 몰래 마셨다. 새끼 가졌다는 걸 핑계 삼아 할머니 밥을 다시 얻어먹으며 산달을 기다렸고 예정일보다 한 달 먼저 아이가 태어났다.


 출산 후 2박 3일은 산부인과 병원 입원실에서 예후를 봐야 했다. 모유 수유하는 방법과 배냇저고리 입히는 법을 배웠다. 여전히 몸이 무겁고 불편해서 맘껏 움직이지 못했지만 축하해 주러 오겠다는 가족과 친구들을 오지 말라 할 수는 없었다. 드라마를 보면 갓 아이를 낳은 산모가 축하해 주러 온 친정엄마나 시어머니 손을 붙잡고 ‘죄송하다’며 우는 장면이 나왔었다. 힘든 일을 앞서 해낸 여자들에 대한 감사이자, 감사할 줄도 모르고 살았던 지난날에 대한 사죄 같은 거였다. 이런 클리셰는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이어서 나는 출산을 하고도 절대 누구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제일 고생한 사람도 나이고, 앞으로 고생할 사람도 나일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둘째 날에 나를 보러 왔다. 수술받은 것도, 투병한 것도 아니었지만 몸이 혹사당한 상태라서 입원실 침대에서 사람들을 맞았다. 할머니는 침대 오른쪽으로 와서 내 손을 꼭 잡았다. 고생했다는 말을 듣는데 이제껏 말라 있던 눈가가 찌르르 울리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할머니는 ‘고생 다 해 놓고 왜 울어.’하면서 같이 울었다. 엄마를 봐도 남편을 봐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온통 다 쏟아졌다.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이 결국 똑같이 하는 것도 흔한 전개일 거다. 갓 태어난 아이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고 연약했다. 잘못 안았다가 품에서 떨어질까 자칫 세게 안으면 아이가 다칠까 봐 손끝부터 팔꿈치까지가 모두 덜덜 떨리곤 했다. 이 아이를 키우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 다가올 날들도 두려웠다. 그리고, 끝까지 입 밖으로 말을 하지 못했지만 할머니께 고맙고 미안했다. 쉴 새 없이 아이를 낳고 기른 여성에 대한 존경이었다. 나는 할머니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할머니가 구십을 향해가며 나는 혹시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아기를 낳게 되면, 그 아기가 할머니의 영혼을 갖고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할머니는 어떤 식으로든 내 옆으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이었고, 흔한 표현처럼 할머니의 엄마가 되어 내가 받은 사랑을 다시 돌려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할머니가 장수하신 덕에 나는 나를 키운 사람과 내가 키울 사람의 사이에서 몇 해를 보낼 수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놀러 가면 할머니는 거실 바닥에 폭신한 이불을 깔아 놓았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거실을 돌아다니다 다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이는 할머니를 보면 배시시 잘 웃었다. 아이는 할머니를 ‘왕할머니’라고 불렀다. 왕할머니와 아이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비슷했다. 질기거나 오래 씹어야 하는 음식은 먹을 수 없었고, 간이 너무 세어 맵거나 짠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음식은 뻥튀기. 깔아 놓은 이불 위에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기와 할머니가 마주 보고 앉아 뻥튀기를 먹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뻥튀기를 베어 물었다. 아이를 안고 앉았다가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웠다가 아이가 칭얼거리면 토닥이다가 할머니가 드실 물을 떠 왔다. 그 몇 해를 내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있을까? 선명한 해상도로 남은 하루는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의 몸은 쪼그라들었지만, 사랑의 총량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자식들을 키운 사랑 그대로를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전하고 계신 것을 나는 알았다. 이제 할머니의 새벽 기도에 꼬물거리는 아기의 이름도 등장할 거였다. 할머니 손으로 키워 낸 손주가 낳은 작고 여린 생명체. 어떤 기대나 의무감 없이 사랑만 할 수 있는 존재.


 할머니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주변에 베풀던 사랑과 배려는 대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일까.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사랑을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다. 당신 손으로 식사를 차리기도 버거워질 정도로 쇠락한 할머니에게서 어떻게 그런 마음과 힘이 나오는지. 나는 내 아이가 사랑받는 것이 좋아서, 그리고 아이를 보면 환해지는 할머니의 얼굴이 좋아서 문턱이 닳도록 할머니 방을 드나들었다. 할머니가 가장 바랐던 일을 내가 하고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고 그것으로 늙은 할머니가 아주 완벽히 행복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할머니는 이제 다 이루었다고, 늘 의지하던 그분처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이전 09화 9. 할머니가 대체 뭘 알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