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작 Mar 27. 2024

9. 할머니가 대체 뭘 알아?

[할머니의 손] Ⅱ. 나를 이룬 것의 팔할


 아파트로 이사 온 후로 줄곧 집의 가장 큰방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용했다. 으레 그 집의 주인이 쓸 법한 안방이었다. 안방에는 작은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 아홉 살 열 살 때까지만 해도 나는 큰방 할머니 이부자리 옆에서 함께 TV를 보다 잠이 드는 것을 좋아했다. 음량을 한껏 높여 놓은 TV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나 사극, 가족 오락관 같은 것을 할머니와 함께 봤다. 최수종이나 정태우가 등장하던 화면은 하도 자주 봐서 그게 어떤 이야기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하루의 마무리는 일일 드라마였고 젊은 배우들이 나와 둘이 연애하다 결혼하고, 새로운 가족을 이루면서 좌충우돌하는 늘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됐다. 매일 싸우다가도 마지막에는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며 이야기가 끝났다. 저렇게 시시한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싶었지만, 할머니는 놓치지 않고 꼬박꼬박 드라마를 봤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큰방은 엄마가 절대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기에 뭔가 혼날 일을 하고 난 다음에는 그곳으로 피신했다. 엄마는 큰방을 관리하지 않았다. 관리는 할머니 몫이었다. 저녁 시간에는 할머니든 할아버지든 거실로 잘 나오지 않았다. 서로 나눌 수 있는 대화 주제가 없었을뿐더러 만날 때마다 할아버지와 엄마는 상극이었으며, 할아버지는 줄곧 아빠를 혼내기만 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나머지 가족들을 적절히 떼어놓아야 했다. 특히 할아버지가 술 취해 들어왔을 때는 얼른 방으로 모셔 가서 문을 닫고 재우려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나나 동생이 소환되어 관심 없고 이해되지 않는 주제에 대한 일장연설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노인 특유의 반복되는 잔소리와 질문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그 짐을 대신하여 짊어지던 할머니가 안쓰러웠지만, 그래도 그 방으로 들어가 할머니를 돕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할머니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늦은 오후의 거실을 좋아했다. 그때는 둘이 딱 붙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체온도 나눌 수 있었다.


 열다섯 살이 넘어가자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여느 친구들 집과는 달리 한집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불만이었고, 집에서 제일 큰방을 두 노인이 차지하고 앉은 것이 불만이었다. 할아버지가 쓸 만하다며 거리에서 주워 오는 잡동사니들도 싫었다. 이제는 엄마나 아빠도 그분들처럼 늙어 가고 있었는데도 그 둘이 제일 작은 방을 나눠 쓰고 있는 것이 불만이었다. 삼촌들이 한 명씩 출가하며, 여섯 명으로 이전보다 단출해진 가족 구성에서도 여전히 큰방은 연장자의 몫이었으며 할머니는 죄지은 사람처럼 ‘너희 엄마가 이 방을 써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제사 한 번 하겠다고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정이 될 때까지 북적거리는 집이 싫었다. 하지만 큰방을 차지하는 것이나 주기적으로 돌아오던 제사는 할아버지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면서 아빠나 엄마가 설득할 수 없는 범주에 있었다. 그 무력함과 흘러감이 온통 불만이었다.


 내겐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지만 불가능했다. 이차성징이 시작되며 꾸준히 다니던 수영 교실을 그만두고 싶던 내게 할머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었다.     


 “여자애가 크면 유방이 나오지, 그게 뭐가 창피하다고 수영을 그만두냐.”     


 나는 유방이나 창피 같은 단어를 적나라하게 듣는 것이 소름 끼쳤지만 길게 설명하지 않고 수영 교실을 관두었다. 할머니는 모를 것이다. 사면에서 시선이 꽂히는 기분과 나를 공격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내 정신을 갉아먹는 일을 지속할 수 없었다. 세심하지 못했던 부모와 친척들은 성장해 가는 큰딸의 몸을 신기해했는데 그 시선도 관심도 모두 싫었다. 그 모든 것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방문만 열면 서로의 위치가 한눈에 파악되는 밀도 높은 환경에서 가출 말고 그럴 방법이 딱히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할머니는 내가 집중하는 것들에 큰 관심이 있었다. 처음 PC 통신이란 걸 접하게 되자, 귀가하면 그것부터 켤 정도로 중독됐다. 통신이 연결되는 소리, 공기를 찌르는 듯 재재거리는 기계음을 들으면 가슴이 설렜다. 가입해 둔 동호회를 차례로 확인하고 글도 쓰고 채팅도 했다. 나의 얼굴과 몸을 모르는 사람들과 오로지 글씨만으로 소통하는 기분은 색달랐다. 외모를 포함한 모든 외양에 불만만 느끼고 있던 내게 그것을 넘어 소통할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니 기뻤다. 익명에 기대어 나도 예쁜 척이나 잘난 척, 멋진 척을 할 수 있었다. PC 통신으로 만난 사람을 직접 대면하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들이 우스웠다. 나를 만나면 모두 실망할 것이 뻔한데,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할머니는 내가 매일 붙잡고 있는 컴퓨터를 궁금해했는데, 누군가로부터 ‘공부에 쓰는 물건’이라는 말을 듣고 난 다음부터는 그 앞에 붙어 있는 나를 대견해했다.      


 “또 공부하는 거야? 열심히 해라.”     


 할머니가 공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방문을 닫고 나가면 나는 동호회에 새 글이 올라오지 않았나 확인하고, 자주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길게 쓴 사연을 보냈다. 이런 일들을 할머니가 공부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스러웠다.


 엄마가 처음 할머니와 합가 하기로 했을 때는 솔직히 두 어르신이 이렇게까지 오래 사실 줄 몰랐다고 한다. 내가 대학교 정도 갔을 때 즈음이면 두 분을 편하게 보내드리고 엄마의 노년을 조용하고 잔잔하게 맞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의 졸업과 취직과 이직을 모두 지켜볼 때까지 장수하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얻었을 때, 아무리 봐도 할머니가 기뻐 여길 만한 직종이 아닌 것 같아 말하기까지 한참을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일부러 모기업의 이름을 말하고 그 계열사인 ○○ 비즈니스 그룹으로 입사했다고 빙빙 돌려 말을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모기업의 타이틀만 보고 우리 손주가 그렇게 좋은 곳에 입사했구나 기뻐하다가, 기쁜 소식을 알리러 전화한 셋째 삼촌에게서 정확한 업종명을 듣고 난 후 들뜬 기분을 가라앉혔다. 그다음부터는 덤덤하게 ‘그래, 일 열심히 하면 되지.’라며 응원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인재인 줄 알았던 할머니가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는 패배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사회 초년생으로 접하는 업무는 매번 힘들었다. 야근이 많아 일찍 잠자리에 드는 할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도 줄어들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가 어려워 독립은 언감생심, 적어도 밥솥에 따스한 밥이 늘 준비되어 있는 본가에서 끝에 끝까지 버티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대중교통이 끊겨 매일 택시를 타는 일도 별로였지만 매일 돈으로 성과로 역량으로 압박하는 직장 분위기가 무척 괴로웠다. 먹은 것도 없이 체하고, 잘 먹어도 살이 빠지는 날들을 겪을 때 할머니가 화를 내며 말했었다.     


 “그 회사는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냐. 그만둬 버려, 그냥! 다른 데 가서 일해라.”     


 언제나처럼 할머니는 나의 편을 들며 손주를 괴롭게 한 대상을 욕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할머니는 물정도 몰라. 취직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할머니는 그런 거 하나도 안 해 봤으면서 대체 뭘 안다고 그만둬라 어쩌라 하는 거야. 할머니가 대체 뭘 안다고.


 결국 다니던 곳을 퇴사하고 진로를 틀어 다른 공부를 하기 시작했을 때도 할머니는 말했다. 공부도 좋지만, 얼른 결혼해야 하지 않겠냐. 시집가서 빨리 아이도 낳고. 나는 할머니를 몰아세웠다. 할머니, 결혼하는 데 얼마나 돈 드는지 알아? 집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 이렇게 공부하고도 또 백수 될지 모르는데 내가 얼마나 피 말리는 줄 알아?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 줄 알아?


 할머니는 대꾸하지 않고 듣다가 일어섰다. 잔뜩 약이 오른 나를 혼자 있게 하고 다시 할머니의 자리로 돌아갔다. 전쟁과 같은 역사적 비극을 실제로 겪은 분 앞에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 줄 아냐며 다그치던 손주에게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할머니는 너도 힘들겠구나 했다. 감정을 다 정리하고 그저 열심히 할 밖엔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다고 받아들인 후 내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떤 조언도 충고도 없는 말 한마디가 도리어 큰 위로가 되었다. 날카로운 말을 뱉고 한참을 후회하며 자책하던 차에 할머니는 투박해진 손으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고, 나는 거기에 기대어 한숨을 쉰 다음 다시 할 일을 뚜벅뚜벅 해 나갈 수 있었다. 할머니가 없으면 어떡하지. 할머니의 툭툭한 손이 없어지면 어떡하지. 할머니에게 절대 사라지지 말아 달라고 빌고 싶은 날들이었다. ⏯️

이전 08화 8. 할머니의 손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