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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Mar 13. 2024

7. 그 사이의 자리

[할머니의 손] Ⅱ. 나를 이룬 것의 팔할


 “네가 아들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어렸을 때부터 밥 먹듯 들어온 말이다. 형제 많고 친척 많은 일가의 장손으로 태어나는 건 현대 사회에서 득 보다 실이 많을 텐데요,라고 웃으며 받아쳐야겠다는 건 지금에서야 하는 생각이다. 먼 친척 어른들로부터까지 그런 말을 들었고, 그럴 때마다 사고가 마비되곤 했다. 그들은 한탄이라고 말했지만, 모종의 강요처럼 들렸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지속해서 강요받는 느낌이었고, 상황을 빨리 끝내려면 잽싸게 그 자리를 피해 도망가거나 머리를 비우고 헤헤 웃는 방법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아들 타령과 할아버지의 아들 타령은 좀 다르게 다가왔다. 할머니는 아들을 낳아야만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 또는 아들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좀 더 많다는 생각을 하는 분이었기에, 나나 엄마를 염려하는 마음이 더 묻어났다. 매일 밖을 살피며 비가 오면 어쩌나 눈이 오면 어쩌나 걱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고 나 또한 그 정도의 무게로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듣기 싫다고 생각은 했어도 도망가고 싶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할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아들 타령은 할머니와 달랐다. 할아버지의 중심은 자신과 족보에 있었다. 진지하게 ‘대가 끊기는 것’을 걱정했다. 우리 가족 중 세상이 극도로 변화해서 가장 혼란스러웠을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할아버지였을 거다. 할아버지가 아들 타령을 할 때마다 나는 내 존재가 모조리 부정당한 느낌을 받았다. 무척 소모적인 일이었고, 타고난 성별을 바꿀 시원한 해결책도 없었기에 할아버지가 한 것은 오랜 괴롭힘이었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회갑 때 온 친척을 동원하여 큰 잔치를 벌였다. 큰 형님이 생신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가깝고 먼 친척들이 몰려왔다. 이 분은 할아버지 동생의 자녀, 이 분은 할아버지 동생의 조카 하는 식으로 도저히 그 호칭을 다 외울 수 없는 여러 사람을 만났고 신기하게도 그들은 내 이름을 다 알았다. 며느리들은 색깔을 맞춘 한복을 입었다. 막내 삼촌의 예비 신부만이 깔끔한 투피스 정장을 입었고, 난 그분이 엄마들 중에서 제일 예뻐서 얼른 나의 숙모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회자의 능숙하고 구수한 진행에 따라 절차가 이어졌고 자녀들이 술을 한 잔씩 올리는 순서가 됐다. 아버지 대에서는 장남인 우리 아빠가 술을 올렸다. 다음은 손자 대였는데 사회자가 눈으로 슥 훑어 손자들 구성을 보더니, 나보다 어린 사촌 남동생을 앞으로 불렀다.     


 “자! 손자가 한 잔 올리시게!”     


 장남 아버지의 큰딸인 나는 뒷전이 되었다. 걸음마하는 아기 때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나였고 당연히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줄 알았기에 어리둥절했다. 어른들은 저런 건 여자애 말고 당연히 남자애가 하는 거라고 했다. 그날 일에 대해서는 가족 중 누구도 다시 언급하지 않았고, 굳이 물어 듣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원래 그랬는데 뭘. 할아버지의 큰 잔칫날, 특히 친척 어른들이 모두 모이는 큰 자리에서 나는 꼭 뒷줄에 서 있어야 하는 거야. 나는 할아버지한테 술도 따라드리지 않고 노래도 불러드리지 않을 거야. 적응하면 되는 거였다. 할아버지의 철학이자 오래 굳은 관념이고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단단한 것이었으니까.


 동생이 태어나 유치원생까지 자라는 동안에도 할아버지의 아들 타령은 끊이지 않았다. 둘째까지 딸로 태어나자 할아버지는 마음이 조급했던 것 같았다. 그맘때쯤 할머니는 더는 아들 타령을 하지 않고 두 딸내미를 소중히 키우는 방식으로 매일을 일구고 있었다. 두 손녀가 ‘여자라서 배우지 못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드디어 확신하셨던 듯하다. 더불어 나와 동생은 어느 집에서 멀쩡한 아들을 데려온다고 해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그 관계 속에서 평안을 얻고 계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은근히 또는 대놓고 엄마에게 셋째를 낳을 것을 강요했다. 내게 지나가는 한탄이 강요처럼 들렸었다면, 엄마에게 던지는 말은 강요 그 자체였다. 부부가 결정해야 할 일에 당신도 투표권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게 할아버지가 겪어 온 세상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강요에 굴복할 만큼 유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은근히 말하면 은근히 거부했고, 대놓고 말하면 무시하는 식으로 대처했다. 그러던 중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대가족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4인 가족 정도가 쾌적하게 살 수 있는 평수의 아파트였는데 삼촌들을 포함한 여덟 명 정도가 방을 쪼개고 나누어 복작복작하게 살았다. 엄마는 새로 이사한 집에 여럿이 앉을 수 있는 큰 소파와 일인용 회전안락의자를 들여놓았다. 소파는 머리를 받치는 범위가 넓어 그걸 밟고 올라가 거실 이쪽에서 저쪽까지 뛰어넘어 다닐 수 있었다. 할머니는 자칫 미끄러져 다칠까 봐 매일 주의를 주었다. 작은 체구를 도구로 나는 책장 선반이나 소파 모서리 같은 것을 밟고 넘어 다니는 기행을 자주 부렸다. 즐거운 장난이었다.


 그날 할아버지는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왔다. 약주를 좋아하고 친구가 많던 할아버지는 자주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독립한 자녀들이나 친척들에게 전화를 돌려 이번 선거에서 몇 번을 찍어야 한다는 말이나 유명 정치인을 향한 욕 또는 칭찬을 했다. 그날도 그렇게 지나갈 수 있었겠으나 안타깝게도 그 타깃이 엄마가 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어미 나오라는 호령이 떨어졌다. 퇴근 후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로 엄마가 호출됐다. 할아버지는 회전안락의자에 앉았다. 머리를 뒤로 젖혀 기댄 자세가 그림책에서 보던 어느 나라 황제 같았다.     


 “셋째 낳아라, 아들 낳아라.”

 “저는 우리 애들 둘이면 충분합니다.”

 “어른이 낳으라면 낳아야지! 아들이 있어야 하는 거다!”

 “낳을 생각이 없어요.”

 “딸만 둘이면 당연히 아들을 낳아야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끝없이 되풀이되는 대화 속에 공포를 느껴 불안정하게 소파 모서리 위를 뛰어다녔다. 이쪽으로 가면 엄마가 있고 저쪽으로 가면 할아버지가 있는 좁은 거실을 횡으로 움직이며, 내가 이 대화를 얼른 끝내 버릴 수 있기를 바랐다. 할머니가 늘 걱정하던 대로 휙 미끄러져 거실 한가운데로 떨어져 버리면 두 사람이 하던 말을 멈추었을까. 수십 번 반복된 연습으로 이동에 능숙해진 내가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고 모서리 위를 뛰어다님으로써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대화는 길어졌고 누군가의 명령으로 나는 방에 문을 닫고 들어가 있어야 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할아버지는 황제처럼 앉아 있었고, 엄마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자 할아버지는 엄마한테 욕지거리했다고 한다. 온갖 상스러운 욕설로 찍어 눌러보려 했지만, 엄마는 꺾이지 않았고 두 자매로 자녀계획을 마무리한다.


 할아버지는 방으로 돌아가서도 한참 화를 내더니 금세 곯아떨어졌다고 한다. 엄마는 분을 삭이며 나를 보러 왔다. 평소보다 격앙된 상태로 내게 책을 읽어주는 엄마를 할머니가 찾아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화를 터뜨릴 때마다 벌벌 떨었다. 할아버지가 자식 여럿을 가부장 앞에 복종하는 사람으로 키워 낸 방법은 당연하게도 공포정치였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를 무서워했다. 그런 할아버지 앞에서 가부장제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며느리가 반기를 들었으니 그 시간 또한 할머니에게 지옥 같았을 거다. 분이 풀리지 않은 할아버지가 만만한 아내 앞에 쏟아내는 격앙된 고성을 할머니는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 두려움에 며칠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할머니께 주어진 자리는 거기였다. 화난 할아버지와 공격받은 가족들의 사이. 할아버지를 진정시키고 다른 가족을 토닥여야 하는 자리.     


 할머니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서운하지…. 그래도 아버지한테 그러면 안 된다….”     


 하지만 할머니가 속으로는 거의 울고 있었다는 걸 나는 안다.      


 “내일 아버지한테 죄송하다고 해라…. 내가 미안하다.”     


 할머니는 오래 고민했을 것이다. 이 난리를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지를. 누구에게 고개를 숙여달라고 부탁하며 고개 숙여야 할지를. 엄마는 그때 울먹였다. 할머니의 말 한마디에 엄마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엄마는 할머니의 처지와 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내가 미안하다. 그래도 아버지한테 그러면 안 된다….”     


 엄마는 울었고 할머니는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나도 우는 엄마를 보면서 함께 울었다. 그날 그 방에서 우리 여자 셋은 몸으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는데, 그 눈물의 의미가 같은 결이었다는 것도 나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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