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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Mar 06. 2024

6. 롤러스케이트와 스키, 그리고 큰 사람

[할머니의 손] Ⅱ. 나를 이룬 것의 팔할

 할머니가 내게 품은 가장 큰 소원은 ‘큰 사람이 되는 것’이다. 비유와 상징이 가득한 그 단어가 가진 진짜 의미를 모르면서도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발표라도 시킬라치면 그걸 곧잘 인용했다. 그런 말을 하면 칭찬을 많이 받았다. 할머니는 아주 솔직히는, 딸로 태어난 나를 서운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딸로 태어나 받게 될 차별이나 한계 같은 것들을 자꾸 떠올려 보셨던 것 같았다. 할머니는 한글만 읽고 쓸 줄 아는 무학의 노인이었고, 하나 낳은 딸 또한 제대로 공부시키지 않고 남자 형제들의 뒷바라지만 시켜왔었다. ‘요즘 세상’에 태어난 내가 촘촘한 교육을 받지 않을 리 없는데도 할머니는 꾸준히 큰 사람 이야기를 했다. 내가 이만큼 하고 있는데도 큰 사람이 안 될까? 또 여기까지 더하면? 할머니의 의중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었다.


 더 자라서는 할머니가 말하는 큰 사람이란 것이 아주 외향적인 사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겉으로 명확히 드러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내 성별을 아쉬워했고 딸이 하면 흉하다 여겨지는 것들에 그게 뭐 어떠냐며 반문하곤 했으니, 내가 몸짓이 크고 괄괄한 어린이가 되면 할머니의 기대를 충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여자아이의 특성으로 여겨지는 것들 – 긴 머리에 조심스러운 태도, 타인을 잘 챙기고 꼼꼼한 성격 –을 내가 답습하여, 태어난 성별 그대로의 여자아이로 자라지 않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내가 태권도를 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큰소리를 꽥꽥 지르거나 팽이처럼 빙빙 돌거나 번개처럼 돌진하여 달리는 것도 좋아했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들거나 몸짓을 크게 하는 것도 좋게 봐주었다. 그럴 때마다 ‘너는 여자애가 기차 화통 삶아 먹은 소리를 낸다’, ‘말만 한 처녀들이 요란스럽게 군다’라며 핀잔을 들을 때가 많았지만 할머니만은 그런 나를 좋아해 주었다.


 할머니가 말하는 큰 사람의 정의가 그런 것이라면 기꺼이 실현해 드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타고난 기질과 반대되는 행동을 해도 자아에 별 타격이 없는 것이 유년기의 특권이라면 특권이었다. 타인을 배려하거나 주변을 잘 살피는 태도를 대체 왜 부정적으로 보셨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저 타고난 성별로 인해 당신이 하지 못 했던 일들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고밖에. 할머니는 내가 새로 산 예쁜 원피스를 입거나 큰 리본이 달린 귀여운 모자를 쓰면 그건 그 나름대로 좋아하셨으니,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하고 그저 무작정 손녀를 좋아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할머니가 또 좋아했던 것은 스포츠를 거리낌 없이 하는 내 모습이었다. 태권도 학원에서 몸 쓰는 것에 익숙해지고 롤러스케이트를 선물 받았다. 당시 잘 나가는 초등학생의 필수품이었기에 할머니는 내가 그걸 탈 때마다 무척 즐거워했다. 내가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공터를 누비고 있으면 할머니는 멀찍이서 지켜보며 가끔 ‘잘 탄다.’, ‘멋있다’라는 식으로 추임새를 넣으며 응원을 보내주었다. 아무래도 지켜보는 사람이 있으면 좀 더 신이 나기 마련이다. 할머니는 시범을 보여주거나 요령을 알려 줄 수는 없었지만, 그 곁을 지켜보고 서 있는 것만으로 내게 좋은 스승이 되었다.


 몸을 다칠 수도 있는 스포츠를 즐기는 것과 그러다가 진짜 다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그날도 한판 신나게 롤러스케이트를 타러 한쪽 발에 신발을 꿰고 일어서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한쪽 발에 꿰인 롤러가 제멋대로 앞으로 나가 버린 것이다. 보호장비 없이 바닥에 손을 짚었고 그대로 엄청난 손목 통증을 맞닥뜨렸다. 할머니는 넘어진 내게 다가와 손목을 호호 불어주고 꾹꾹 눌러 마사지를 해 주었다. 그 처치는 이런 말로 끝났다.     


 “무슨 옌장 맞을 로-라 스케트가 이 모양이냐! 이거 다 갖다 버려라!”     


 바퀴가 달렸기에 그 용도 대로 굴러갔을 뿐인 롤러스케이트가 한순간 ‘옌장 맞을 것’이 되어 버렸다. 골절이나 염좌였다면 가당치도 않았을 재래식 처치들은 손목의 일시적 통증이 금세 가라앉음으로 효과를 보았다. 어린아이를 달래고자 일부러 연기를 섞은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그 물체를 매섭게 타박하는 듯한 그 말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할머니는 그랬다.     


 조금 더 키가 크고는 스키를 배웠다. 그해에 일가친척 내에서 스키 붐 같은 것이 불어서 그 자녀들이 스키캠프에 다녀오고 관련 장비를 사 모으고 하는 일들이 있었다. 초보자니까 일단 저렴한 것을 입으라는 취지에서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요란한 형광색들이 뒤섞인 스키복과 방한 고리바지가 주어졌고, 그걸 입고 스키캠프에 참석했던 나는 이 스포츠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에 무척 만족하고 있었다. 아빠 형제들끼리 매우 끈끈하게 교류했던 터에 명절을 제외하고도 대규모의 친척 모임을 자주 했었는데, 그 해를 전후해서는 삼삼오오 모여 스키장으로 나들이를 가는 일이 몇 번씩 있었다.


 할머니의 생신은 한겨울에 있었다. 친척들이 모두 모일 기회가 생기자, 누가 제안했는지 모 스키장 리조트를 빌려 일박이일의 생일잔치를 열자는 말이 나왔다. 겨울 스포츠에 흠뻑 빠진 친척들은 단숨에 수락했고, 한겨울 온 친척이 온갖 스키 물품을 차에 싣고 살던 지역에서 꽤 멀리 떨어진 리조트까지 행차하게 된다. 리조트 지하에는 어린이 게임장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사촌 동생들과 거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특히 즐거웠다. 맛있는 밥을 먹고 스키를 타고, 사촌들과 군것질하며 게임을 몇 판 즐기다가 저녁에는 노래방 코스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상적인 스케줄이었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각자의 이유로 한껏 들떠서 이 모임의 진짜 이유를 모조리 잊은 것을 빼면.


 할머니의 생신 명목으로 이곳에 모였지만 사람들은 그걸 금세 잊은 것 같았다. 할머니는 스키를 못 탔다. 몸이 약한 할머니가 기초부터 배워 즐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아무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차에 실려 처음 와 보는 설원에 와서 어리둥절 서 있다가, 생신 축하 케이크와 축하를 받고 또 어리둥절 설원을 구경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모두의 관심사 대부분이 스키 슬로프에 집중되어 있었고 할머니는 그보다는 뒤 순번이었다. 생신은 구실에 불과했다.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눈을 지치며 내려왔다. 초보용 슬로프 옆에는 산책로 같은 것이 마련되어 있어 그 위에 올라가면 슬로프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할머니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까르르 웃으며 비탈을 내려오는 손주들을 할머니는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손을 휘휘 저어 인사하면 할머니도 응답했다. 할머니가 완벽히 좋아하는 모습을 내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빠르고 요란하고 다소 위험한 활동. 이쯤이면 나는 큰 사람에 가까워졌을까. 그때는 할머니의 만족한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해석하는 그 얼굴은 서운함에 가깝다. 돌아오는 길에는 모두가 지쳐 있었고 피곤함 때문에 조금쯤 짜증이 나 있었다. 그해 할머니 생신은 그걸로 마무리됐다. 할머니는 기억나지 않는 어떤 해에‘이제 생일이 나한테 무슨 소용인가 싶다’라고 말했었다.


 유년기가 지나고 사춘기를 보내며 ‘나’에 대해 오래 생각했고, 나는 아무래도 활동적인 스포츠를 즐기는 것보다는 책을 읽거나 글 쓰는 활동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본격적으로 학업에 매진하게 되며 운동을 포함한 예체능 취미들을 서둘러 정리했고 책상 앞에 앉는 시간이 더 많아졌는데, 오히려 그 편이 내게 맞춤한 듯 편하게 느껴졌다. 스포츠를 시청하는 것에조차 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가 롤러스케이트나 스키나 수영 같은, 할머니가 선호하는 활동들을 다시 하지 않는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손주의 기질을 마침내 받아들였고 열렬히 응원해 주었다. 거기에 덧붙은 말은 ‘큰 사람이 되면 된다’는 거듭된 주문이었다. 할머니의 큰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했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았다. 큰 사람이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큰 외연을 가진 단어임이 분명하다.


 사춘기에 접어들며 급격히 말수가 적어진 나는 집에 오면 늘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혼자 있곤 했다. 할머니는 손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가도, 닫힌 방문을 살짝 열기만 해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손녀 앞에서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나는 큰 사람이 되라는 말을 내 귀로 더는 듣지 않게 됐다. 성적 잘 받아 좋은 대학에 가려는 목표나 친구들 틈에서 따돌려지지 않고 안전할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큰 사람이 대체 뭘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이제야 다시 그 궁금증을 꺼내본다. 큰 사람이 되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하는. 할머니는 남을 속이지 말라고 했고 무슨 일이든 성실하게 하라고 했다.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해야 하지만 너무 힘들면 그만두라고 했다. 가족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응원하는 모습을 늘 보여주었다. 겪어 낸 세상의 범위 안에서 도출한, 사랑하는 손주가 되어야 할 어떤 인간상 같은 것들에 대하여 할머니는 꾸준하게 내게 보여주었다. 할머니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내게 가르침을 주는 분이었으니까. 살아계신 동안 직접 묻지 못했지만, 그 답은 이미 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할머니는 마치 주문처럼 당신의 희망을 몇 번이나 속으로만 되뇌었을 것이다. 마지막 입원하기 전의 전날까지 이어진 할머니의 새벽 기도에서도 그 말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얘가 큰 사람 되게 해 주세요, 큰 사람 되게 해 주세요, 하고. 나름대로 세상을 겪고 회복하고 일어서 본 지금까지도 그 단어가 가슴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말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희망 또한 할머니가 남긴 것일 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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