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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Feb 21. 2024

4. 어느 사고 염려 전문가의 고백

[할머니의 손] Ⅱ. 나를 이룬 것의 팔할

 외출하기 전에는 가스, 전기 등이 안전한 상태인지 확인한다. 창문이 모두 잘 닫혀 있는지 확인한다. 불안하거나 위험한 느낌을 주는 창문은 이중창을 모두 잠근다. 오래 켜져 있을 때 문제가 될만한 가전의 전원을 모두 끈다. 이틀 이상 집을 비워야 할 때는 위에 쓴 모든 일을 두 번씩 확인하고 현관문을 닫고 나간 후에도 뭔가 빠뜨린 것이 있지 않을까 다시 문을 열고 확인해 보게 된다. 현관에서 눈으로만 훑어보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신발을 벗고 안까지 들어와 여전히 찜찜한 마지막 점검한다.


 거의 의식이라고 부를만한 외출 루틴에 예상치 못한 사건이 한 번씩 끼어들면 그때부터는 불안도 높아진다. 한 번은 냉장고 문이 잘 닫히지 않은 것을 모르고 외출해서 삼십 분 남짓 있다가 귀가한 적이 있다. 삐삐 거리는 경고음이 화재경보처럼 들렸다. 반찬 그릇 몇 개가 미지근하게 식은 것 말고는 크게 문제없었는데도 나 자신을 타박하느라 하루를 꼬박 썼다. 냉장고 문 한번 만져보는 것을 하지 않고 외출을 하다니! 내 루틴에 냉장고 문 체크가 추가됐다.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려고 수도꼭지를 연 채로 일하다가 그걸 잊은 채 나가서 반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수도꼭지를 약하게 틀어놓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세면대에 찰랑찰랑하게 차오른 차가운 수돗물을 보면서 얼마나 자책했던지. 손에 힘을 주어 수도꼭지를 닫는 이 쉬운 일을 왜 나는 하지 않았던 것인가! 


 특히 나는 아무도 없는 집 – 내가 위험요소를 관리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집 - 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99퍼센트의 확률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집은 너무나 멀쩡하게 그 상태 그대로 있었지만, 그건 여러 번에 걸쳐 이어지는 점검 절차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거듭하는 강박적인 루틴이었다.    

 

 할머니는 나이가 드니 자꾸 깜빡깜빡한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가스 불을 잊는 일이 가장 많았다. 밥 짓기를 숙명으로 여기던 할머니는 노쇠해진 후에도 음식을 끓이거나 삶거나 달였고, 이렇게 불을 오래 써야 하는 일들은 옆에 딱 붙어 관리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반가운 전화라도 올라치면 할머니는 가스 불을 까맣게 잊고 전화기를 붙들었고, 이상한 냄새가 온 집에 퍼지고 나서야 내가 먼저 알아차려 황급히 부엌으로 뛰어나가곤 했다. “할머니! 불! 불!”하며 가스 불을 끄면, 할머니는 놀란 눈으로 뛰어나와 “어머야…. 이거 어째….”했다. 이런 식으로 가스를 쓰면 언젠가는 이 집에 불이 날 거야. 큰 불이 날 거야.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막막한 표정으로 “이 솥단지 어떡하냐…. 이거 다 탄 거 어떡하냐….”라고 읊조리는 것을 모른 척했다. 까맣게 그을린 솥이나 냄비도 결국은 엄마나 아빠가 번 돈으로 마련한 것이었으므로 할머니는 그걸 아껴 써야 했고, 도저히 원상복구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할머니는 온 힘을 실어 박박 닦아댔다. 그런 날의 기억은 탄 음식 냄새와 녹아내린 냄비 손잡이에서 나는 매캐한 플라스틱 냄새,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깥바람 냄새 같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솥단지’가 탈 때 할머니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때의 나는 할머니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세어져 있었을 땐데, 어깨를 들썩이며 한 시간 넘게 그을음을 지우고 있는 할머니께 내가 할 테니 좀 쉬시라고 말하지 못한 게 너무 후회된다. 그 이후로 할머니는 가스레인지를 거의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가스 불을 오래 켜 놓아야 하는 조리는 아예 하지 않았다. 평생 붙들어 온 일을 놓는 것으로부터 할머니는 노화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나라면 속 시원하다 했을 텐데, 할머니는 늘 동동거렸다. 일하고 돌아온 며느리가 저녁 식사까지 준비하는 것을 보며 저걸 내가 해야 하는데 어쩌냐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손녀에게는 ‘네가 엄마 대신 해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는데, 그건 또 할머니 의중대로 해 드려야 한다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나를 무척 원망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밥 만이라도 챙겨야겠다며 냉장고에 들어있는 반찬 통을 그대로 꺼내놓고 밥상을 차렸다. 할머니가 만들지 않은 할머니의 밥상. 할아버지는 다 먹고 난 그릇을 수돗물에 스치듯 흔들며 설거지했다. 그들의 식사 자리가 끝나면 선반에 음식물 찌꺼기가 그대로 묻어 있는 그릇들이 즐비했다. 그 또한 노화의 흔적이었고, 나는 강제적으로 마주하는 노화의 흔적에 슬슬 질려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무래도 제멋대로 사는 것이 특기인 노인이었는데 쑥뜸을 그렇게 좋아했다. 쑥뜸은 베란다에서 했다. 분유 크기만 한 깡통을 베란다에 두고 그 안에 쑥을 넣고 불을 붙이는 식이었다. 쑥을 태우는 냄새는 담배 태우는 냄새와 비슷하다. 집 안쪽에서 냄새가 감지될 때마다 나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층간소음으로 살인까지 벌어지는 시대에 돌아보면 아찔하기 그지없는 일이었고, 냄새로 인한 이웃 간 분쟁까지 갈 필요도 없이 공동주택에서 뭔가를 태운다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할아버지는 심지어 알코올램프 같은 것을 구해 와 엄마가 거금 들여 깔아놓은 마룻바닥 위에서 쑥을 태우기도 했다. 인생이 너무 무료하면 뭔가 실험을 하고 싶어지는 걸까? 젊어서 발휘하지 못한 탐구 정신이 그런 식으로 발현되는 걸까? 나는 그 모든 행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일들이 엄마와 아빠가 출근해 있을 때 벌어졌던 건 할아버지도 그게 환영받지 못할 행위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 사이에서 가장 난처했을 이는 할머니였을 거고. 노부부가 지내던 방은 베란다 바로 옆에 있었으므로 쑥뜸 깡통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할머니는 대책 없이 마셨다. 저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다가도 내가 할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면 “그래도 쑥이라 몸에는 좋다. 나쁜 거는 아니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내가 매일 전기며 가스를 점검하고 잠자리에 든다고 해도, 할머니는 가스 불을 잊고 할아버지는 쑥을 태웠다. 내가 제거한 위험요소들은 그분들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하나씩 더해졌다. 튼튼하고 고집 센 자아를 가진 여럿이 함께 모여 살며 다소간 위험한 일이 생겼고, 그걸 해결할 능력이 내게는 없었다. 가족과 함께 사는 삶에는 어느 정도의 포기가 깔렸다. 강박을 교정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은 포기였다. 내가 집착하는 것들이 실은 의미가 없고, 내가 타인과 엮여 사는 한 꾸준히 그럴 것이라는 포기.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차츰 강박적인 외출 점검을 놓아가다가 독립하며 증상이 다시 돌아왔다. 이것저것 점검하는 행위는 같아도 동동거리는 정도가 좀 나아졌는데, 이것은 나이 듦이 주는 축복이었다. 할머니만큼 나이가 들면 더 무던해지게 될까. ‘노파심’이라는 단어는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늙은 여성과 같은 마음을 뜻한다는데, 그것도 어느 시점이 지나면 흐릿한 걱정이 되나 보다. 아직 그만큼 나이 들지 않은 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지금 내게도 나이 듦의 흔적이 있다면,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는 일이 잦아지는 것이다. 플라스틱 수납 바구니를 여러 개 사서 늘어놓아도 그 위치조차 까먹는 일이 생긴다. 외출할 때 쓰는 가방을 바꾸면서 신용카드나 지갑, 휴대폰을 예전 가방에 고이 넣어두는 바람에 난처한 일도 많았다. 하필 그런 일은 물건 계산대에서 발견되곤 한다.


 할머니처럼 가스 불을 오래 켜 두기도 한다. 재료를 굽기 전에 예열을 한답시고 잠시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가 그걸 잊고 다른 식재료를 손질하고 있는 것이다. 프라이팬이 불에 달구어져서 나는 냄새나 열기를 알아채자마자 나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가스레인지 쪽으로 몸을 날린다. 오래 삶거나 달이는 조리법에는 도전해 볼 의지가 전혀 없으므로 그걸 시도해보지는 않을 것 같지만 무슨 바람으로라도 그걸 해 보게 된다면, 나 또한 할머니처럼 솥단지를 까맣게 태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십 년 후를 상상할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사람이 영원할 수 없다는 명제를 이해하고는 있어도, 나 또한 그렇게 쇠퇴해 가리란 것을 피부로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상황에 마치 내가 있는 것처럼 상상하고 나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 공감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상상의 대상을 깊이 사랑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이다. 할머니를 많이 사랑했다고 자부하는데도 잔잔한 일상을 불쑥 침범하는 어떤 것들에, 대개는 노화의 증거였을 그것들에 무척 예민하게 굴었고 그것은 할머니의 일이지 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사랑이란 말하기는 무척 쉽고 실행하기에는 무척 어려운, 복잡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자부하던 사랑 중 할머니께 정말 가 닿았던 사랑이 어느 정도 크기였을까. 할머니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나를 토닥여 주실 테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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