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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Feb 14. 2024

3. 할머니가 자주 아팠던 이유

[할머니의 손] Ⅱ. 나를 이룬 것의 팔할

 할머니는 자주 아팠다. 아무리 봐도 타고난 체질 자체가 건강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다양한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해 가며 자라지 못했을 거고, 몇십 년간 고강도의 노동을 도망갈 데도 없이 고스란히 해내야 했을 것이므로 더 그랬을 거다.


 할머니는 친정에서 시키는 대로 할아버지와 결혼했다. 할아버지는 같은 지역, 같은 또래에 산 하나 넘어 살던 사람이었다. 수준이 잘 맞는 양반 집안 간의 혼사였기에 무리 없이 성사됐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가문에 자부심이 있어 몇백 페이지의 족보를 보물 다루듯 했다. 양반 가문 운운하며 나의 사소한 습관들을 교정하고 싶어 했다. 고등학교 역사 시간, 격변의 시기에 양반 족보가 어떤 식으로 유통되었는지를 배우고 나서는 할아버지의 집착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아빠의 대학 입학과 동시에 가족을 줄줄이 이끌고 상경하여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어느 숯불갈비 집의 주차관리 요원으로 은퇴한 할아버지는 나의 아빠와 엄마가 벌어오는 돈에 의지해서 노년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족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할아버지는 태어나는 손주들의 이름에까지 관여하며 족보 지키기에 몰두했다. 여자가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귀하게 여기는 손녀만은 그렇게 해 주었다는 생색을 당해 보기도 했다. 그 책에 내 이름이 적히든 말든 별 상관이 없었기에 뭐라고 답할지 몰랐고 내가 아이를 낳으면 좀 다른 느낌일까 싶었다. 그러나 출산 후에도 여전히, 내 몸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아이에게 어떤 가문 소속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것이 여전히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져 할아버지가 목숨처럼 지키는 일이 무척 공허해 보였다.


 할머니는 막내딸이었고 귀여움을 받느라 집안일이라고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강제 징집을 피하고자 서둘러 진행된 결혼이었으므로 할머니는 어떤 준비도 하지 못 하고 새댁이 되었다. 귀하게 자란 막내딸이 소위 양반 종갓집 맏며느리가 된 것이다. 할머니를 며느리, 올케, 질부 등으로 칭하던 많은 이들 틈에서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이 멀뚱멀뚱하게 서 있었던 게 생각난다고 했다. 상을 차리라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고. 아침상을 물리고 나면 또 점심상을 준비해야 했고, 종일 이일 저 일을 하며 온몸이 갈려 나가도록 일했다. 할머니는 가장 무서웠던 집안 어르신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그 단어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실수하면 크게 불호령이 날아와서 그게 그렇게 무서웠단다. 혹시 이름이 기억이 난다면 수납장에 방치된 족보 책을 들추어 누가 그렇게 할머니를 괴롭혔나 찾아봤을 거다.


 어느 날 할머니는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고 집을 나왔다. 갈 곳이 없으니 우선 친정으로 가야겠다 싶어 산을 넘어 달렸다. 지금으로 치면 산장이나 여행객을 위한 식당 같은 곳이 산속에 있었는데 그 주인이 하필이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식구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도움을 청하자, 주인은 시집간 여자가 어디를 도망가느냐며 할머니를 엄하게 꾸짖었고 할머니는 산에서 내려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주인의 말에 느낀 바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었을 거다. 할머니가 무사히 친정까지 갔다 한들 똑같은 말을 들었을 것이고 결과도 같았을 거였다. 할머니의 일탈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조금씩 김이 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폭풍 같은 감정의 홍수를 조금쯤 잠재울 수 있었을 거다. 김이 새어야 다시 숨 돌리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노동량을 계산해 본 적이 있다. 그때 집에서는 가족과 일가친척 포함하여 스무 명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밥을 짓는 여자들은 세 명 정도. 딸들이 커서 국자만 잡을 수 있으면 이 일에 동원되었을 것이니 조리 인원을 네 명에서 다섯 명 정도로까지 늘려볼 수 있겠다. 스무 명분의 대규모 식사를 준비한다고 치면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를 잡아야 할 거고(최소 시간으로 잡았을 경우다), 그렇게 삼시 세끼면 4시간 30분에서 6시간 정도를 준비시간에만 써야 했을 거다. 식사 후에 산더미 같은 설거지 처리까지 하려면 최소 1시간씩을 더 추가하여 하루 3시간(이 또한 최소 시간으로 잡았을 경우다). 그러면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 정도를 밥을 위하여 소요해야만 하는 거다. 나머지 시간이라고 할머니가 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거고 육아는 물론, 청소 등 각종 집안 살림과 밭일 등 바깥일까지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노동은 태어났으니 살아내야 한다는 명제와 비슷한 비중으로 할머니에게 주어진 일이었을 것이며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수는 없었을 거였다.


 젊어서 그렇게 혹사당한 할머니의 몸이 노년이 되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과로하지 않는 날도 할머니의 손마디는 퉁퉁 부어 있었고, 신체는 꾸준히 소진되기만 했다. 이것은 불가역적인 것으로 어떤 치료나 약으로 이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었다. ‘건강한 몸을 다시 돌려주겠습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실 건가요?’라는 제안을 받는다면, 할머니는 절대 수락하지 않을 것 같다. 삶의 어느 시점이 지나면 회귀하여 시작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헛된 욕망 대신, 어서 이 코스를 안주하고 결승선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


 사람들이 노화를 받아들이는 가장 첫 번째 신호는 머리가 허옇게 세는 것이나 쪼글쪼글한 주름을 발견하게 될 때겠으나, 실제 노화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있다. 겉모습이야 어떻든 내부 기관이 잘 돌아가기만 하면 생존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 심각한 소화 불량으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고, 배변에 문제가 생겨 아침마다 고생하는 일을 겪거나, 무릎이나 허리 통증으로 걸어 다닐 때 보조기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 비로소 늙음의 무게가 자신의 것으로 느껴진다. 중요한 것을 자꾸 잊거나 불면에 시달릴 때도 마찬가지다. 노화는 반드시 신체의 기능 저하를 동반한다. 신체가 여러 가지 이유로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태를 병이라고 부르므로 노화는 병을 가져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다. 게다가 기능이 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신체적·정신적 통증까지 동반한다. 병증 없는 노화와 죽음을 맞는 사람은 ‘복 받았다’라고 말하고 호상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쓰는 것을 보면, 모두의 인식 속에 노화는 병증과 같은 의미로 박혀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태어난 이는 필연적으로 늙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고통의 순번을 받아 놓고 긴 세월을 기다리는 존재들인 건지. 인생의 마지막 라운드가 병증으로 인한 고통이라면 굳이 거기까지는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할머니도 그런 것들을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맞아들였다. 우선 허리 때문에 걷는 것이 더뎠다. 할머니는 성당 새벽 미사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는데 거기까지 가는 길이 험난했다. 몇 번이고 멈추어 주변에 걸터앉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잠시 쉰 뒤 다시 일어나 가는 식이었다. 누군가가 부축을 해 주어도 마찬가지였다. 다리를 여러 번 움직이는 것 자체가 무리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거동이 가능할 때까지는 성당에 다니는 것을 놓지 않았다.


 귀가 들리지 않아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겼다. 아주 가까운 데에서 큰 소리로 말을 해야 겨우 알아들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마치 싸움이 난 것처럼 지르는 목소리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고 필연적으로 대화가 줄었다. 결국 할머니는 보청기를 사용했는데 보청기에서 높은 주파수의 알 수 없는 기계음이 났다. 몇 번이고 수리했으나 원인을 찾기 힘들자 할머니는 그저 들리는 것이면 뭐든 참아 내는 편을 택했다.


 소화 불량이 심했고 한번 체하면 실신할 정도로 구토를 했다. 할머니가 말년까지 먹었던 음식 중 하나가 토마토였는데, 얇은 껍질을 잘 소화하지 못하여 냄비에 삶고 벗겨내어 부드러운 안쪽 살만 먹었다. 고기류는 꿈도 꾸지 못했고 그나마 오리고기 종류만 조금씩 소화해 냈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니 배변도 마찬가지였고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 노쇠해지니 삶의 질이 엉망이 됐다. 할머니는 소화 불량과 구토 문제로 병원 신세를 자주 졌다.


 청력이나 보행 문제와는 달리 실신이나 구토, 갑자기 앓아눕는 증상은 도드라져 보이는 병증이었다. 이로 인해 구급차나 응급실, 대학병원 같은 단어가 끌려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젊은 사람도 겪을 수 있는, 노화와 동떨어져 보이는 증상이었기에 조금 다른 양상으로 비추어졌던 것 같다. ‘박 할머니 큰일 났다’라는 느낌을 생생하게 주는 현상이었고, 그럴 때면 온 가족이 총출동됐다. 병상에 누운 할머니가 앓고 있으면 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전화를 돌렸으며 그들이 번갈아 방문하여 안부를 물었다. 행사 때마다 바쁘다고 뭉개던 셋째 아들까지 호출할 수 있는 건이었다. 자식들은 아픈 할머니를 위한 몇 가지 선물을 놓고 갔고, 할아버지께 식사를 대접하러 모시고 나갔다. 할머니는 나를 비롯한 함께 사는 가족들 몇몇과 함께 썰물 빠진 듯 고요해진 집에 있었다.


 시간이 약인 병증이었는지 아니면 자식들 얼굴을 한 번씩 본 것이 주효했는지 모르나 어쨌든 할머니는 병문안 이후에는 천천히 나았다. 다시 식사도 하고 성당도 가고 했다. 물론 예전의 모습만큼 나아지진 않았고 꽤 쇠락한 상태로, 신체 기능 또한 조금씩 깎여 나간 상태로 말이다. 할머니가 앓아눕는 빈도는 해가 갈수록 잦아졌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자식들 보고 싶으면 저러시나 보다. 어린애들이 저래. 나 좀 쳐다봐 줘, 하고 갑자기 아프고 그러는 거야. 할머니도 어린애가 되나 보다.


 할머니의 고유성이었던 다정함과 자애로움이 흔들림 없이 유지됐던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현명했던 사람이 조금씩 흩어져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따스했고 다정했다. 그게 사라진다면 할머니를 더 이상 할머니라고 생각할 것 같지 않았으므로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소진해 가는 기능처럼, 할머니가 지녀온 성품도 그 끝이 닳아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면 정말로 그렇게 될까 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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