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손] Ⅱ. 나를 이룬 것의 팔할
초등학교 입학 이전의 기억은 대부분 선명하거나 명확하지 않지만,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는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어쩌면 자란 후에 그것에 몇 가지 양념을 얹어 새 이름으로 기억을 만들어 다시 저장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 가공했는지와는 관계없이 그 시절 할머니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감각은 그대로다. 그걸 떠올리는 것이 살아가는 데에 상당한 힘이 된다.
나는 네 살부터 돌봄 기관에 다녔다. 지금이야 돌 갓 지난 유아도 보낼 수 있는 어린이집이 많이 있지만, 그때는 네 살짜리가 기관에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네 살 유아를 전문적으로 돌볼 수 있는 기관도 흔치 않았다. 나보다 나이 많은 유아들과 함께 묶인 반에서 생활했다. 선배들이 나를 노는 데에 잘 끼워주지 않아 외톨이로 있는 일이 잦았다. 버스를 타고 외부 견학이라도 갈라치면, 단체 사진을 찍을 때마다 키가 작아 전체 구도를 해치던 나는 기둥 옆 가장자리로 가라는 말을 듣곤 했다. 사진 기사 아저씨의 호통 때문에 기둥 옆에 쭈뼛거리며 앉아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네 살짜리 어린이의 견학 기념 단체 사진은 아직도 본가 앨범에 그대로 남아 있다. 작은 체구와 키라는 신체 조건만으로도 예상되던 바였으나, 같이 놀 친구도 없고 놀자고 다가오는 언니 오빠들도 없으니 사회생활의 쓴맛을 꽤 일찍 본 셈이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기관들의 이미지는 저들끼리 합쳐져 한 덩어리가 되었다. 모든 공간에서 나는 큰 무리에서 어느 정도 틈을 두고 벽 쪽에 가까이 앉아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곤 했다.
유치원에서는 정기적으로 어린이 생일잔치를 열었다. 생일을 맞은 주인공 어린이는 종이로 만든 왕관을 쓰고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었다. 선생님이 빨간색 립스틱으로 생일자의 입술을 칠해주기도 했었다. 잔치 중에 어린이가 부모님께 큰절하는 순서도 있었으므로 그날은 엄마들도 잘 차려입고 유치원에 출석해야 했다.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예를 갖추는 절차였으나, 엄마는 그걸 받겠다고 직장 일을 하루 쉴 수가 없었다. 당연한 대타로 할머니가 큰절을 받으러 출석했다. 나는 색동저고리에 빨간색 치마를 받친 한복을, 할머니는 은은한 옥색이 도는 한복을 입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엄마가 와 있는데 나만 할머니가 와 있는 것이 좀 창피했다. 그때 할머니는 동네미용실에서 뽀글뽀글하게 볶은 파마머리를 검게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형적인 ‘동네 아주머니’의 상징으로 그 부분이 제일 창피하게 느껴졌다. 기왕이면 할머니보다는 엄마가 유치원 행사에 왔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했다. 엄마가 다갈색 모발에 자연스러운 웨이브가 들어간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할머니가 오면 선생님들은 어르신을 대접하는 의미에서 할머니께 더 좋고 편한 자리를 배정해 주고, 큰절받는 순서를 앞으로 당겨 주었다. 그게 내가 받는 콩알만 한 혜택이었다.
부적응의 경계에 선 나를 보다 못한 할머니가 동네 아는 언니를 연결해 줬다. 그 집 엄마한테 ‘우리 애 하고 좀 놀아달라’고 부탁하는 단순한 방법이었다. 아는 언니는 좋은 사람이었다. 견학 가는 버스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 주었고 가끔 먹을 것도 나눠 주었다. 뾰로통해 있는 나를 곧잘 챙겨주었다. 듣기로는 그렇게 알뜰살뜰 챙겨주었다는데 나는 이름도 기억 못 한다. 내 희망은 유치원에 잘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가지 않는 것뿐이었다. 집에서 내복 바람으로 뒹굴뒹굴하며 할머니가 내 오는 간식이나 먹는 것이 더 좋은데, 왜 나를 자꾸 집 밖으로 내보내려 하는지 의아했다.
여러 이유로 나는 유치원의 모든 것이 점점 싫어졌다. 그중에서도 제일 싫은 것은 체조 시간에 선생님이 정해 준 내 자리가 하필 창가라는 것이었다. 선생님을 따라 어설프게 체조를 하다 보면 땀이 나며 체온이 올라갔는데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온 강한 햇볕이 안 그래도 더운 나를 괴롭혔던 거다. 햇볕이 너무 따갑고 더운데 내 자리는 늘 거기였고 해님은 하필 나만 따라다녔다. 눈이 부셔서 꼭 감고 있으면 시선 안쪽에서 붉으면서도 샛노랗고 번쩍이는 파도가 일렁였다. 나는 그것이 태양의 실제 색깔이라고 생각했다. 노란색이나 주황색 크레용을 하나씩만 써서는 그려낼 수 없는 색이었다. 구름이 어서 그것을 가려 응달을 만들기를 바랐다.
“할머니, 나 유치원 안 가.”
“왜? 왜 안 가.”
“해님이 나만 따라와. 체조할 때 나만 따라와.”
유치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할머니한테 고자질하는 느낌이었지만 이미 말은 뱉어진 후였다. 선생님이 나를 고자질하는 나쁜 어린이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되면서 더욱더 유치원에 가기 싫어졌다.
할머니는 손주에게 닥친 위기를 해결해 내고야 마는 사람이었기에 결국 유치원 선생님께 전화하고 만다. 그리고 아이에게서 들은 내용을 전한다. 가끔 상상한다. 할머니가 ‘아이가 해님이 따라온다고 한다’는 말을 선생님께 아이의 표현 그대로 전달했을까? 할머니 특유의 찬찬하고 보드라운 말투로 ‘해님’ 같은 단어를 발음했을 것을 떠올리면 싱긋 웃음이 나온다. 그걸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유치원 생일잔치에서 상석을 마련해 주던 선생님들은 이번에도 역시 할머니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주셨고 나의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 주었다. 맞은편 자리에 서서 아침 체조를 하게 됐다. 햇볕 때문에 눈을 감을 필요도, 땀을 흘릴 이유도 없는 쾌적한 자리였다. 그러나 고자질쟁이가 되어 버렸다는 자책감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할머니 때문에 내가 참을성 없고 핑계 많은 고자질쟁이라는 걸 선생님께 들키고 말았지만, 그래도 유치원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더는 들지 않았다. 할머니가 나의 자리를 바꾸어 줄 수는 있어도 내가 유치원에 안 가게 할 수는 없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여야 했다. 손녀의 일이면 무엇이든 해결해 주던 할머니가 결코 해 줄 수 없는 일이라면, 그냥 해야 하는 거였다.
할머니는 어린 나에 갓 난 동생까지 두 자매를 동시에 육아하던 중이었다. 자매 외에도 집안 살림에 할아버지 뒤치다꺼리와 삼촌들 건사까지 해야 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불한당들이 사방에서 엄마, 할머니, 임자 등으로 불러대며 요구하는 것들에 하나씩 응답해야 했던 할머니의 속. 왜소한 할머니의 체구에서 자식이 여섯이나 나왔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 손으로 쉰이 넘어서까지 육아와 살림을 놓지 않고 꾸려 온 것도 신기하기 그지없다. 나의 기관행이 일렀던 이유도 모두 거기에 있었음을 이제는 안다. 할머니에게 매달린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나는 잠시라도 분리되어 있어야 했고, 그건 할머니가 용인하지 않을 수 없던 분리였다.
그러니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며, 가족들이 원하는 대로 착실히 먹고 놀고 자라는 것이 내게 던져진 임무였다. 해님은 다시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고, 따라온다 한들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할머니에 대한 타박이나 원망 대신, 결국은 어린 나와 할머니가 공생하기 위해 서로 노력했다고 새 이름으로 기억을 저장한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만 우리는 아주 환상적인 콤비였다고, 그때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갖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내가 할머니께 부여한 캐릭터는 외유내강 슈퍼우먼이다. 사람은 비자발적으로도 강해질 수 있다. 살며 언제고 한 번은 그걸 겪어야 한다. 이렇게 고역스러운데도 그 틈에 할머니는 새끼가 낳은 새끼를 아끼고 사랑하기까지 했다. 살아 있는 모든 어미가 이걸 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한편으로는 징그럽고 슬프다. 할머니는 창피하지만 좋은 사람. 허약하지만 강한 사람. 온갖 모순을 다 버무려 놓은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싫기도 좋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