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손] Ⅲ. 할머니가 이상해졌다
내 아이가 자라는 만큼 할머니는 늙었다. 노화에는 가속이 붙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몇 해를 찌르는 듯한 기계음과 함께 사셨는데 잘 맞지 않는 보청기가 문제였다. 몇 번이고 수리를 받고 또 받았으나 기계음은 깨끗하게 사라지지 않았고 언제까지 이게 불편하다는 걸 말할 수 없었던 할머니는 그저 견딜 뿐이었다. 집에서는 기계음 나는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계시는 날이 많았다. 할머니와 나 사이의 의사소통이 거의 되지 않았던 것도 그 탓이었다.
할머니는 같은 말을 여러 번 물었다. ‘오늘 뭐 했니’ 같은 질문에 ‘일 갔다가 돌아와서 지금 막 밥 먹었어요’라고 대답해도 할머니는 응? 응? 하고 여러 번 내용을 확인했다. 청력 때문인 것을 알면서도 피로에 찌든 나는 그걸 편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이미 그맘때쯤은 내가 하는 일들 –문서를 작성하고 결재를 받는– 의 절반 이상을 할머니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어린아이 때처럼 밥 먹고 잠자고 뛰어노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할머니가 겪어 보지 않은 일을 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때부터는 할머니의 질문에 손짓을 크게 쓰기 시작했다. ‘할머니, 저 밥 먹었어요.’를 말하고 싶으면 손을 가슴에 대서 ‘나’를 표시하고 이후 밥을 떠먹는 시늉을 하며 ‘먹었어요’를 말하는 식이었다. 입 모양과 표정도 크게 쓰며 말했다. 할머니와 대화할 때는 최대한 밀착해 앉아야 했다. 가까이서 말하면 할머니는 그나마 알아들었다. 이 요란한 대화 방식에는 큰 에너지가 들었지만, 나누는 말들이 특정한 정보량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께 나의 하루와 동선과 인상적이었던 것들을 늘어놓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할머니는 그저 말할 상대가 필요한 것일 뿐, 그게 꼭 나일 필요는 없었을 거였다. 점차 서로가 이 대화에 지쳐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방법은 할머니가 어떤 질문을 하든, 명확하게 단답하는 것이었다. 할머니한테 그저 말하는 행위만이 필요하다면, 그 말동무만 되어드릴 수 있다면 오가는 말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늘 뭐 먹었니?”
“네, 먹었어요.”
“맛있는 거 먹었다고?”
“네, 밥 먹었어요.”
“내가 잘 안 들린다. 뭐 먹었다고 한 거야?”
“네, 밥 먹었어요.”
이런 식의 의미 없는 대화가 몇 턴 지나가면 할머니는 곧 귀가 안 들려서 손주의 이야기를 잘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말을 멈추곤 하셨다. 대화를 계속 이어가도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리라는 결론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하는 행위 자체는 성립하였으므로 할머니는 적적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종 할머니가 너무 안 들려서 답답하다고 토로할 때마다 나는 내일도 모레도 할머니를 만나는 모든 시간에 그 하소연이 이어질 것을 예상하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말했고 할머니의 등을 토닥거렸다. 물론 할머니는 전혀 괜찮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의 위장은 진작부터 그 기능이 쇠하였지만 사람은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영양을 섭취하는 일은 지난하게 이어졌다. 할머니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끼니에 할머니는 많이 씹지 않아도 저절로 삼켜지는 부드러운 음식을 찾아드셨다. 그러나 어떤 날에는 뭔가에 홀린 듯이 맞지도 않은 음식을 찾아 삼키곤 했다. 고기나 빵이나 맛이 강한 음식 같은, 젊은 날의 할머니가 어렵지 않게 소화했을 음식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할머니의 하소연이 다시 이어졌다. 내가 왜 그걸 먹었을까. 왜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을까. 할머니는 스스로를 탓하며 아픈 배를 부여잡았고 심지어는 자리에 드러눕기까지 했다.
섭취와 소화와 음식 조절에 어떤 어려움도 느껴보지 못했던 나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래 씹어 드시면 될 일이고 그게 아니라면 소화 안 되는 음식을 피하면 되는 게 아닌가. 아니면 소량의 음식을 오랜 간격을 두고 자주 드시면 될 일 아닌가. 가족들이 흔하게 시켜 먹는 배달 음식에서 고소하고 자극적인 냄새가 풍겨 나올 때 그 찰나를 참을 수 없었던 할머니의 심정을, 지극히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나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먹는 행위가 단순히 영양을 보충하는 것에서 나아가 사람에게 즐겁고 가치 있는 여가가 될 수 있음을 떠올리지 못했다. 한 가족이 같은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소속감과 동질감을 나는 떠올릴 수 없었다.
크게 아팠다 돌아온 할머니는 기름진 음식을 먹는 가족 곁에서 밍밍하게 끓인 밥이나 동치미 국물 같은 것을 드시며 끼니를 때웠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또 폭발적인 식욕이 올라올 때면 소화할 수 없는 음식을 꺼내 드시고 다시 아팠다.
할머니가 자잘하게 아픈 일들은 내게 이미 익숙한 것이었으나 기억나지 않는 어떤 시기를 기점으로 할머니는 크게 달라졌고, 그리고 좀 이상해졌다. 할머니는 같은 노인정에 다니는 한 동생 노인을 험담하기 시작했다.
“그 망구가 내 욕하고 다녀. 딴 할매들한테 나랑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할머니는 항상 몸을 깨끗하게 하고 다니는 분이었고 남들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는 분이었다. 그런 할머니를 싫어하고 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었다. 신경 쓰지 마시라고 말해도 할머니는 계속 동생 노인을 의심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다 그 사람 탓이라고 했다. 여러 번 말해도 해결되는 것이 없자 이번에는 장성한 아들들에게 전화해서 이르기 시작했다. 항상 정성을 다하던 넷째 아들이 온갖 간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가서 노인정 할머니들에게 선물하며 우리 엄마 잘 좀 봐 달라는 무언의 부탁을 전했다. 이제는 좀 나아지겠다 싶었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따돌림당하고 욕을 먹고 있다고 했다. 참다못한 아들 하나가 낯익은 어르신 몇몇 분께 상황을 청해 물으니 깜짝 놀라며 ‘그 착한 어르신을 다들 좋아하지 누가 욕을 해요’라고 답했다. 그제야 모두가 조용히 짐작했다. 할머니가 이상해지고 있다고.
할머니가 학교처럼 드나들던 노인정에 발길을 끊으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더 정확히는 화장실이 딸린 안방에서 기거하는 날이 많아졌다. 어떤 운동도 바깥 활동도 자유롭지 않은 할머니였기에 그나마 노인정에서 점심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소일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그 마지막 자락이 사라져 버린 셈이다. 할머니는 노인정을 조금 두려워하기도 했다. 이 두려움은 할머니의 쇠약해짐에 속도를 붙였다.
자식들이 급히 주간 보호센터를 알아보았다. 노인정을 떠나 센터에 간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여러 노인이 함께 있는 공간임은 동일했고 할머니가 같은 문제를 겪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 노인들 간에 어떤 일이 있으면 중재해 줄 수도 있고 문제가 생기면 보호자에게 전달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할머니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가득한 집단을 아직도 견디어 낼 수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말동무 없이 방 안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결론이었다.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다. 덜 자란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과 더 늙을 일만 남은 노인을 주간 보호센터에 보내는 것은 비슷해 보였다. 나는 아기를 어린이집 현관 앞까지 데려갔고 선생님이 아이를 맡아주는 동안 직장 일을 했다. 주간 보호센터 이름이 적힌 봉고차가 도착하면 보호자가 노인을 인계하고 인솔자가 노인을 차에 태웠다. 노인이 센터에 있는 시간 동안 가족들은 각자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주간 보호센터에 정식으로 등록하여 다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해 겨울 꽁꽁 언 빙판길에서 할머니는 크게 넘어져 다쳤다. 할머니는 가까운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할머니가 입원했다는 사실은 내게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할머니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오실 테고 나는 할머니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이제 좀 괜찮으시냐고 할머니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할 말을 건넬 수 있을 거였다. 할머니가 병원에서 집에 돌아온 직후에는 온통 안도감과 죄송함이 가득했으므로 할머니가 재차 응? 응? 이라고 되묻는 모든 것에 몇 번이고 답해 드릴 수 있었다. 모두가 익숙한 패턴을 수행한 지 몇 년째였다. 너무도 익숙했기에 그게 어떤 방식으로 변형될지 깨어질지 짐작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