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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Sep 11. 2024

22. 할머니의 비밀 서랍

[할머니의 손] Ⅳ. 흔적과 기억과 시간


 미뤄왔던 일을 하기로 했다. 할머니 장롱의 비밀 서랍을 정리하기로.         

  

 어렸을 때 나는 엄마에게서 피해 있고 싶을 때 종종 할머니 방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한밤을 함께 지내면서 할머니가 큰 장롱의 비밀 서랍을 특별한 방법으로 여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포도알 무늬가 새겨진 서랍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서랍 하부장의 천장에 난 동그란 구멍에 손을 넣어 서랍을 움직이면 조금씩 앞으로 빠져 열리는 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서랍이 두 개가 붙어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서랍의 존재를 숨길 의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 내가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굳이 숨길 의도가 없는 서랍이었으니 ‘비밀’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까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서랍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할머니가 중히 여기는 것들이 그 안에 있었고, 누군가에게 보이기 싫어서 꼭꼭 숨겨 놓은 것이 아니라 혹시나 도둑이라도 들면 손대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보호해 놓은 것에 가까웠다.     


 할아버지의 이사 이후로 몇 주에 걸쳐 큰방에 있던 불필요한 물건들이 정리됐다. 할아버지가 소일하던 책상, 달력과 책들, 벽에 걸려 있던 옷걸이…. 엄마는 조용하고 신속하게 물건들을 비웠고 본가에 들를 때마다 큰방 잡동사니들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물건이 사라지니 정말로 넓은 방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부모가 평생 써 보지 못한 넓은 방이었다. 엄마는 이 방을 비우고 붙박이장을 짜 넣고 아빠가 혼자 쓸 수 있는 방을 만들겠다고 했다. 두 분이 같이 쓰시는 거 아니냐고 하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수십 년을 쓴 안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덕분에 아빠에게는 큰 개인 방이 생겼고 엄마에게는 작은 작업 방이 생겼다. 그 작업 방에서 엄마는 글 쓰고 공부하고 책 읽고 잠자며 살고 있다.


 엄마의 큰 그림에 따라 이제 영물이 된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장롱을 치울 시간이 왔다. 엄마께 할머니의 비밀 서랍은 내가 정리할 테니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그게 뭐냐고 묻는 엄마께 답을 해주기 싫어 침묵했다. 할머니와 나만 아는 뭔가가 있다는 것이 여전히 좋았기 때문이다.


 날을 잡고 본가에 들러 비밀 서랍을 정리했다. 서랍에서는 할머니의 여권과 사진, 목걸이와 반지, 2002년에 복자 수녀회에 봉헌하고 받아 온 특별회원증서 여러 장, 신부님의 강론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 삼촌들의 결혼식 비디오테이프, 할아버지의 회갑연 비디오테이프 그리고 막내 삼촌의 군번줄과 할머니 안경 하나가 나왔다. 여러 번 접은 작은 종잇조각들도 있었다. 할머니가 직접 쓴 기도문도 있었다. 몹시도 길었던 노년을 지나며 할머니가 매일같이 기도했던 흔적들을 보았다.


 나는 할머니의 소박함에 목이 메었다. 흔한 비상금도 없이 깨끗하게 살다 간 할머니의 홀가분한 뒷모습을 보는 느낌이었다. 어찌 이렇게 살다 가셨을까. 어떻게 이렇게 남한테 주기만 하다 가셨을까 하는 생각에 숙연해졌다. 그런 나와 달리 꺼내놓은 물건을 살펴보던 엄마는 격앙된 목소리로 서운함을 토로했다. 이유는 복자 수녀회의 특별회원증서 때문이었다. 여러 장의 증서에 할아버지, 아빠, 할머니 당신, 심지어 증조부모님 내외의 이름까지 다 있는데 정작 며느리 이름은 없다는 것이다. 특별회원이 되면 수녀회에서 특별한 미사를 드려준다고 한다. 노년을 겪는 수십 년 동안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던 할머니께 누군가의 이름을 기도 제목으로 올려놓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맏며느리인 엄마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2002년이면 함께 산 지 스무 해가 다 되어가는 때였는데 그 고생 함께 하며 옆에 붙잡아 둘 때는 언제고 어떻게 여기에 내 이름은 뺐냐며, 엄마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냉정하게 할머니 옷을 정리하던 엄마와는 딴 사람 같았다. 할머니의 마음은 이 십 년을 건너 엄마의 마음을 찔렀다. 할머니는 까칠하고 예민한 엄마를 내색하지 않고 보듬던 분이었고 갖은 고생을 같이해 온 엄마도 할머니만은 마음의 안전지대에 두어 왔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가르는 울타리는 너무나 견고했다. 엄마가 넘을 수 없는 울타리였다. 할머니의 솔직한 마음이 숨어 있는 회원증서 여러 장이 엄마를 울게 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느꼈던 감정 그대로, 할머니도 좋고 엄마도 좋아서 마음이 아팠다. 엄마 옆에 할머니가 있었다면 서운하다는 투정이라도 할 텐데 지금은 그럴 수도 없으니…. 내가 대신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엄마 딸 둘이서 엄마 끝까지 챙길 테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

 “아냐, 서운한 건 아니고! 어쩔 수 없어! 그냥 남남이야. 자식이 아니니까…. 그냥 내가 사서 고생한 거야. 그 고생 같이했는데….”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지. 오늘은 아빠한테 서운한 거 다 맘껏 말씀하셔. 아빠, 오늘은 그냥 조용히 듣기만 하세요.”

 “아유, 야! 그래야겠다! 내가 진짜 결혼을 왜 했을까!”     


 아빠의 관심사는 내가 비밀 서랍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에만 있었다. 그래서 엄마 마음도 모르고 자꾸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아빠는 비밀 서랍을 몰랐을 뿐 아니라, 복자 수녀회에서 아빠를 위하여 기도해 주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내 새끼’ 였다는 사실을 모른다.


 할머니의 비밀 서랍은 그렇게 정리됐다. 할머니가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하던 것들에 고이고이 숨겨 둔 사연까지 조용히 정리됐다. 할머니의 유품을 보며 하나씩 추억을 되살린다. 마음이 깃든 물건은 더는 무정물이 아닌 것 같다. 한 사람의 삶이 깃든 소중한 영물들을 보며 그를 위해 조용히 기도했다.


 누군가의 사진이나 물건을 보고 그 사람을 떠올리며 한 번씩 그의 안녕을 기원한다면 그것은 아주 천천히 가 닿아 그를 지켜줄 것이다. 할머니가 매일 새벽 일어나 온 가족들을 위해 바치던 기도의 힘처럼 말이다. 나도 아이를 다 키워 독립시키고 나면 우리 할머니가 그랬듯 아이 사진이나 남기고 간 물건들을 보며 매일 한 번씩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랑의 마음이 세간에서 말하는 ‘수호천사’ 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머니와 이별한 것이 맞는가. 나는 이처럼 할머니가 깃든 물건들을 손에 잡고 자주 할머니 생각을 하는데 말이다. 할머니는 3월에 숨을 거두었지만 나와 할머니의 이별은 1월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해 왔다. 요양병원에 들어간 시점부터 나는 할머니를 만나거나 볼 수 없었다.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언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을 과연 ‘살아있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실은 할머니는 1월에 돌아가신 것이고 그때 나와 당신이 완전히 이별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 헤어짐은 좀 이상하다. 할머니의 얼굴과 손과 몸이 사라졌지만, 그건 할머니의 존재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니까. 늘 떠올리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사람을 ‘떠난 존재’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할머니를 사랑하고 기억하며 그래서 할머니와 이별하지 않았다고 감히 말해 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할머니의 기도 덕에 어떤 시험에 합격했고 직장을 구했고 무사히 아이를 낳아 건강하게 기르고 있고, 내가 누리는 삶의 모든 부분에 ‘위하는 마음’이 속속 배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내 꿈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을 거다. 할머니는 아무래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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