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작 Sep 26. 2024

24. 할머니의 방식으로 내 아이를 길러내는 일

[할머니의 손] Ⅳ. 흔적과 기억과 시간

 


아이는 이제 유치원 졸업반이다. 내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나 방법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할머니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어떻게 자라왔는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낀다. 할머니가 내게 거창한 육아관이나 교육관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 해야 어린이가 늘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받는지 할머니는 늘 보여주었었다.     


 첫째, 아이의 등을 자주 쓸어내리고 어루만져 준다. 할머니는 감정이 동요하는 모든 순간에 등을 쓸어내려 주곤 했었다. 기쁘거나 슬플 때, 그 감정의 세기가 폭발적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할머니는 다가와 내 등을 쓸어내렸다. 손녀가 어렸을 때야 품에 안고 토닥거릴 수 있었겠지만 키와 머리가 큰 다음부터는 내 쪽에서 거부하기 시작했고 대신 이렇게 등을 쓸어내리는 의식만이 계속되었다. 한 번, 두 번…. 커다란 손이 등을 지나갈 때마다 커다란 존재의 품에 폭 안겨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가 놀라운 속도로 크기 시작하자 이제 품 안에 안는 것이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한 품에 잘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엉덩이라도 토닥일라치면 유치원에서 배운 ‘안전삼각지대’를 건드렸다며 성화다. 다만 아이의 키와 함께 넓어진 등을 토닥이는 것은 아직도 유효하다. 뿔이 나서 씩씩거리는 아이에게 무엇 때문에 그러냐고 캐묻는 대신 다가가 말없이 등을 쓸어내려 줄 때 빠르게 진정되는 것을 보며 할머니의 지혜에 감탄한다. 할머니가 등을 쓸어줄 수 있을 만큼 밀착해 있으면 당신이 나를 걱정하는 눈빛도 함께 볼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할머니가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혼자가 아닌 사람은 뭐든지 할 수 있으므로 나는 지저분한 감정들을 털어내고 그다음 것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그 커다란 손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둘째, 아이를 야단쳐야 할 때도 마지막은 꼭 안아주는 것으로 끝낸다. 자라면서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을 연달아했고 그럴 때마다 가족들로부터 매서운 훈육을 받았다. 할머니 또한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지만 잘못한 일에 있어서는 양보가 없었다. 그럼에도 유독 할머니의 훈육은 내게 공포스럽게 다가오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항상 마지막을 안아주는 것으로 마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잘못을 인정하거나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 할머니는 나를 안고 보듬어 주었다. ‘네가 미워서 혼내는 것이 아니야’라는 표현을 언어로 듣는 대신 감각으로 알아차렸던 셈이다.

 아이가 한 살씩 더 먹어갈수록 훈육할 일이 많이 생긴다. 엉엉 울면서도 엄마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나도 덩달아 눈가가 짠하고 울린다. 하면 안 되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주면서도 아이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고, 그러다가 아이가 알아들은 것 같으면 꼭 안아서 그 자리를 마무리한다. 아이가 지금은 내 속을 몰라도 나중에는 알아주겠지 하는 마음이다. 나 또한 할머니 행동의 의미를 다 크고 난 후에야 알았으니까 말이다. 단기적인 효과는 아이가 우는 사람에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 줄 줄 아는 어린이로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설피 울고 있으면 귀 기울여 듣고 보듬어 주어야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아이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을 느낀다.     


 셋째, 같은 자리에 있되 놓아야 할 때 놓아준다. 나를 구성하는 가장 큰 안정감은 할머니가 항상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에 있었다. 어디 가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서.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시간이 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느낀다. 할머니는 변함이 없었다.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방식이 가족들과 이별하는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데 사랑의 결정체인 할머니가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크나큰 안정감이었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며, 지금의 나를 만든 데에 가장 크게 이바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보내야 할 때는 망설임 없이 놓아주었다. 가서 잘 살아라. 그게 할머니가 하는 최고의 축복 메시지였다.

 아직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기에 이것을 내가 오래도록 잘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같은 자리에 있어 주는 것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할 때가 많으므로.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하면서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되어서야 꼭 붙잡는 부모들이 세상에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로부터 받은 것들을 아이에게 잘 전달해 주려면 내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오늘도 이것저것 스스로 해 보겠다고 고집부리며 엄마 품을 조금씩 벗어나려는 아이를 보며, 할머니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 자리에 있되 놓아야 할 때 놓아주기. 그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축복하기. 이만하면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할머니께 중간 검사라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랑은 대물림된다. 오래도록 받은 사랑을 밑천으로 나는 그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 삼십 년이 넘게 받은 사랑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오래 고민하다가 뭐든 써 보기로 했고, 한 글자 한 글자 내가 받은 것들을 적어 넣으니 꽤 긴 글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를 수식하는 많은 단어 – 자애로움, 현명함 – 등이 있었지만 글의 마지막에 나는 할머니를 ‘사랑 그 자체’로 정의한다.


 사랑은 경계 없음. 나와 타인의 경계가 사라져 마치 그 사람의 기쁨과 고통이 온전히 내 것으로 느껴지는 상태. 내가 울고 웃던 모든 순간에 할머니는 조언하거나 충고하는 대신 함께 울어 주었다. 삶에 그런 사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사랑은 경계 없음. 존재의 경계조차 허물어 버리는 것. 서로가 어디에 있든지 마음만은 함께 있다. 할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할머니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당신이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몸이 좁다란 함에 갇혀 흙이 되어 사라진들, 당신이 남긴 사랑의 마음마저 사라질 리는 없으니까.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길어 올릴 때마다 희미해져 가던 할머니의 흔적이 다시 다채로운 색을 얻을 것이다. 그러면 할머니는 외롭지 않을 것이고, 나 역시 그럴 것이다. ⏯

이전 23화 23. 시간이 만든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