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모험은 아니었지만요
여행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사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타고난 저질 체력으로 인해 금방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년쯤 전의 나는 뭔가를 하고 싶어 아주 절박한 상태였다. 지금 이대로의 삶을 견딜 수가 없었고 자극제가 필요했다. 남들 다 그렇듯이 몇 개월 뒤 여행이나 잡아놓고 그걸 바라보며 살아볼까 싶어졌다. 문제는 동행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같이 갈 사람이 마땅히 없으니 여행은 가지 말자'라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그때의 나는 반쯤, 아니 온전히 미쳐 있었다. 이 답답하고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벗어날 기회가 필요했다. 그래서 홀린 듯이, 충동적으로 그 비싼 추석연휴 비행기 티켓과 호텔을 결제했다. 나머지는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하면서.
재미있는 것은 몇 개월 전의 내가 저질러놓은 일을 몇 개월 후의 나는 매우 신나 하며 수행했다는 것이다. 사실 비행기티켓을 결제할 때만 해도, 이러다 결국 취소수수료 물기 전에 취소하겠지 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9월의 도쿄행이니까 그때쯤 태풍이 한두 개 올지도 몰라. 그러면 결국 못 가겠지? 등등 못 가게 될 것 같다고 왠지 굳게 믿었다. 그러나 여행이 2개월쯤 남은 시점부터 내 모든 희망은 추석연휴 그 여행에 가 있었다. 회사에서 열받는 일을 겪어도 '아, 그래도 좀 있으면 여행이니까 참자' 했고, 신나는 일이 없어 지루할 때면 여행서적을 펼쳐 가고 싶은 곳들을 구글맵에 저장했다. 그야말로 여행 안 잡아뒀으면 어쩔 뻔했어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혼자 간다는 공포나 불안은 거의 없었다. 나로서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사진: Unsplash의Erik Eastman
물론 혼자 가는 공포가 적었던 것은 내가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간 갈고닦았던(?) 일본어 회화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실제로 내 회화능력치는 진작에 일본어가 영어를 뛰어넘은 상황이었다. 도쿄 곳곳을 누비며 80% 정도의 소통은 일본어로 해냈다. 여기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것보다 더 큰 것은 없나요? 여기에서 촬영해도 되나요? 이 모든 것들을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해냈다(물론 말이 안 통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영어와 바디랭귀지를 동원). 하네다공항으로 가는 택시에서는 기사님이 나를 일본인으로 착각하기까지 했다!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일본어를 잘한다며 칭찬해 주심) 기본적으로 언어가 통하니 어느 낯선 곳에 떨어져도 그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았다. 주위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혼자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특히 일본, 도쿄여서 더 그랬다. 기본적으로 일본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친절했다(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일단 겉으로는 평균적으로 친절함맥스). 그래서 곤란한 상황이 닥쳤을 때 물어보기가 쉬웠다. 99%의 확률로 친절히 알려주니까. 그리고 도쿄는 서울과 정말 비슷한 구조를 가진 도시라는 점도 좋게 작용했다. 혼자 돌아다니는 게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서울에서 맨날 혼자 돌아다니는데 뭐. 그냥 서울 비슷한 도시에서 혼자 쇼핑하고 혼자 구경하고 하는 행위의 연장선처럼 느껴져서 외롭지조차 않았다.
물론 그래도 '디즈니랜드'나 '해리포터 스튜디오'에 갔을 때는 약간 쓸쓸했다. 시부야 같이 도심 한가운데를 걸어 다닐 때는 전혀 심심하거나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앞에서 언급한 테마파크들에 갔을 때는 아무래도 일행이 없는 것이 조금 불편했다. 포토스폿에서 사진 찍어줄 동료 정도는 있어야 더욱 재밌게 즐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신기한 것을 봤을 때면 '방금 봤어? 대박이지!'라고 말할 수 있는 옆사람이 조금 그리워졌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이번 여행에서 제일 절실하게 느꼈던 문제사항(!)은 바로 체력이었다. 그간 운동도 안 하고 방치했던 내 몸이 여행에서 내게 복수를 단행했다. 일본여행은 하루 2~3만 보가 기본이라는데, 나는 아마 그 반 정도만 소화해 냈던 것 같다. 반나절만 걸어 다녀도 다리가 쑤시고 허리가 아프고 발이 불타올랐다. 시부야에 간 날 원래는 하라주쿠까지 구경하고 돌아오는 일정이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하라주쿠는 다음 기회에 가는 것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간 체력을 키워놓지 않은 스스로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인기 식당이어도 웨이팅이 너무 길면 포기하고 옆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서서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드니까! 여행 끝나고 돌아가면 반드시 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첫 해외여행치곤 꽤나 긴 5박 6일의 도쿄 여행이 끝났다. 나는 혼자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세상이 뒤바뀌고 훌쩍 성장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냥 피곤하기만 하더라. 바쁘게 돌아다녔던 도시여행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쨌든 혼자 해외 도시를 누비며 스케줄링을 하고, 때로는 내 체력을 생각해서 일정을 바꾸기도 하며 다니는 것이 꽤나 즐거웠다. 체력만 되었으면 더욱 열심히 돌아다녔을 것 같긴 해서 아쉽지만. 어쨌든 이번 여행을 통해 인생에서의 산 하나를 넘은 느낌이 든다. 이제 나는 해외 어디든 가고 싶으면 혼자서도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일본 외의 나라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영어공부를 다시 해야겠지만.
*붙이는 말 : 원래는 여행을 다녀온 날인 지난주 수요일에 연재글을 발행할 수 있을 것이라 희망차게 믿었다. 하지만 내 저질 체력이(...) 나를 쓰러뜨려 결국 한 주를 자연스럽게 건너뛰고 말았다. 한 주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불편해하는 스스로가 또 싫기도 하고(복잡한 이 마음). 여하간 앞으로는 얼마 안 남은 연재 성실히 지켜가려 한다. 혹시 기다려주셨던 분이 있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