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한 것을 아신다면 제발 집에 보내주세요
*현실에서 약간 각색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최근 큰 행사 하나를 끝마쳤다. 시작부터 끝까지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게 없었던 행사였다. 당일 아침에 갑자기 식순이 바뀌고, 발표자가 바뀌고, 참석자가 바뀌고... 뼛속까지 MBTI 끝자리가 J인 나로서는 미치고 팔짝 뛰는 경험을 예순다섯 번쯤 하고 나서야 행사가 무사히(?) 끝났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고 터덜터덜 행사장 청소를 하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부서장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오늘 너무 고생 많았어. 내가 아주 비싸고 맛있는 거 사줄게 저녁 먹고 가~"
팀원들은 묵묵히 자리를 치우며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비싸고 맛있는 걸 꾸역꾸역 먹고 9시가 넘어 집에 갔다. 흔한 회사의(또는 오늘날 공공기관의) 에피소드일 것이다.
K-직장인에게 '밥 사는 것'이란 뭘까? 윗사람 기준으로 생각하면,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키긴 했는데 그 일이 좀 힘든 일일 경우, 약간의 고마움과 미안함&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마음을 담은 인사 같은 것 같다. 실제로 회사에서는 (특히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중요한 공공기관에서는) 담당자와의 원활한 관계가 업무 하는 데 꽤 도움이 되므로 협업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밥을 사면서 개인적 친분을 쌓는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도 그런 식사자리에 여러 번 갔고, 내가 만들기도 해 봤다. 그런데 아랫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 어떤 식사자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식사자리는 죽어도 가기 싫기도 하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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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디테일한 상황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을 것이다. 먼저 첫 번째로, 디테일한 상황. 일에도 성격이 있다. 차장 A가 사원 B에게 원래 사원 B가 하기로 되어 있는 일(차장 A를 도와 지출 처리하는 일)을 시키면서, 어쨌든 차장 A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사원 B가 해주는 것이니 고마운 마음에 밥을 사는 경우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원 B는 자신이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밥을 사준다고 하시니 기쁜 마음으로 먹게 된다. 어쩌면 다음에 차장 A를 도와드릴 일이 생겼을 때는 보다 열심히 해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게 '고생했으니 밥 사는' 좋은 예다.
반면 차장 C는 사원 B에게 원래는 차장 C가 해야 하는 일을 억지로 시켰다. 사원 B는 위에서 시키니 하긴 하지만 이미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상황에서 차장 C가 '고생했으니까 밥 살게'라고 하면 사원 B는 기쁠까? 오히려 화가 더 솟구칠 것이다. '고생했으니 밥 사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의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정당하지 않은 일을 시켜 놓고 '밥 사 주는 걸로 퉁치는' 건지 아닌지 아랫사람들은 누구보다 잘 느낀다.
두 번째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중요하다. 이미 '라포(rapport, 두 사람 사이의 상호 신뢰관계)'가 형성된 사이라면 서로 불편하지 않으니 고생스러운 행사가 끝났을 때 그날의 회포를 푸는 뒤풀이를 오히려 아랫사람이 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차장님 오늘 행사에서 ㅇㅇ할 때 저 너무 놀랐잖아요~ 아 진짜 ㅇㅇ은 왜 맨날 한 번에 안 돼서 사람을 고생시킬까요?' 조잘조잘 수다를 떨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한 팀장님과 행사 끝나고 하는 뒤풀이는 즐거울 수가 없다. 행사로 지친 몸을 이끌고 또 불편한 자리에 끌려가 '하하 네 정말 그러네요^^'만 외치다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퇴근(뒤풀이도 업무 그 자체로 느껴진다)하게 될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평소 얼마나 아랫사람과 신뢰를 쌓았는지와 합리적인 업무를 한 것인지이다. 평소 그리 어색하지 않게 좋은 관계를 유지한 후배에게 큰 업무(행사, 회의 등)가 끝나고 고생했다며 밥을 사준다면 후배도 기꺼이 응할 것이고, 관계는 더욱 돈독해질 것이다. 그러나 자기 일을 미룬 후배에게 밥 사 주는 걸로 만회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후배는 오히려 불편한 밥자리까지 만들어낸 선배를 더욱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글을 쓰고 사람들이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어느 정도 예상이 간다. 평소 후배에게 조심할 줄 알며 합리적으로 일을 분배하는 사람은 '아 내가 후배에게 불편한 자리를 만들었던 것인가? 앞으로 식사 자리 제안을 더욱 줄여야겠다'라고 더욱 조심하고, 후배에게 일을 마구 넘기면서도 죄책감 안 느끼는 사람은(혹시 그런 사람이 내 글을 읽는다면) '난 후배들하고 격의 없이 친하니까! 이건 내 얘기 아님. 앞으로도 밥 사주면서 좋게 좋게 풀어야지~' 할 것이다ㅎㅎ 하지만 한 번쯤은 글로 남겨보고 싶었다. 오늘날의 소위 '요즘 애들'도 선배들이 식사자리 만드는 걸 전부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걸. 좋은 맥락만 있다면 선배와의 점심도, 때론 저녁도 흔쾌히 응한다는 걸. 나도 이 글을 쓰고 읽으며 다시 한번 선배로서의 나 자신을 점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