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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Sep 09. 2022

할머니의 무릎

몇 해 전 엄마한테서 반지 하나를 받았다. 고운 보석알 몇 개가 촘촘히 박힌 외할머니의 반지였다.

30년 전 디자인이니 바꾸고 싶으면 바꾸라는 엄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의 마음과 촉감이 깃들인 그대로가 좋았다. 반지의 모양이 달라지는 순간부터 내겐 아무 의미 없는 물건이 될 것 같았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 꼭 맞는 반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할머니 생각이 물밀듯 밀려왔다.

살면서 할머니 생각이 날 때가 있다. 꼭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할머니가 여기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맛있는 걸 먹다가도 좋은 걸 보다가도 할머니 생각이 난다.


어린 시절부터 두 아이의 엄마가 될 때까지 나의 삶에 할머니는 늘 자리매김을 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흐른 20년 동안에도 할머니는 잊히지 않고 여전히 내 마음속에 계시다. 평생을 할머니와 함께한 셈이다.

어릴 때 외가에 자주 맡겨졌던 탓에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작은 반전이었다. 불안하고 예민하던 나는 잠자리가 바뀌는 게 무엇보다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기꺼이 나를 달래며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 주셨다.

거꾸로 된 모양새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세상에 태어난 첫 손녀여서 더 할머니에겐 내가 보물 같은 존재였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들을 엄마보다 할머니에게서 더 많이 얻곤 했다.


첫 아이를 낳고 친정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증손녀를 보러 오신 할머니와 엄마 사이에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 "내 손녀 예쁘죠, 엄마?" 하는 엄마의 말에 할머니는 콧방귀를 뀌시며 "어딜! 내 손녀보다 더 예쁜 아기는 세상에 없다. 내 손녀가 훨씬 더 예뻤어." 하셨다.

할머니와 엄마 사이에 벌어진 때아닌 손녀 자랑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할머니의 세상 최고 예쁜 손녀는 다름 아닌 옆에서 기막혀하며 바라보던 나였고, 그런 할머니와 대결을 펼친 엄마의 손녀는 바로 내 딸이었던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된 내게 할머니는 나 자신을 아끼라고 늘 말씀하셨다. 아이 키우랴 일하랴 바쁘게 지내더라도 나 자신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혼자 밥을 먹을 때도 반찬을 대충 늘어놓지 말고 예쁜 그릇에 담으라고 가르쳐 주셨다. 혼자 커피를 마실 때도 가진 것 중 제일 비싼 잔에 잔받침까지 받쳐 마시라고 하셨다. 나 자신을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대접할 줄 안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우리 집 컵 중 제일 고급스럽고 화려한 잔에 커피를 넣어 마시며 나는 할머니 생각에 목을 놓아 울었다.


내가 둘째 아이를 낳고 다섯 달이 지난 후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췌장암 진단을 받고 두 달 만이었다.

할머니를 차가운 겨울 땅에 묻고 돌아온 후 나는 가끔씩 멍해지곤 했다. 할머니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안 계시다는 걸 믿을 수 없으면서도 장례의 기억은 너무나 선명했다. 그 불일치 속에서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어느 날 침대 위에서 아기를 재우며 모로 누워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잠결에 누군가 "애기, 애기!" 하는 것 같아 소스라쳐 깨어보니 어느새 침대 끝까지 기어간 아기가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얼른 아기를 안으며, 이제 그만 정신 차리라는 할머니의 걱정을 듣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할머니가 나를 어루만져주고 가신 거라고 생각하니 한없이 고마웠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할머니는 의사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잠시 집에 와 쉬셨다.

할머니를 뵈러 외가에 간 나는 눈물을 꾹 참으며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할머니는 눕지도 기대지도 않고 꼿꼿하게 앉아계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철퍼덕 누웠다. 엄마가 "다 큰 게..." 하며 말리려 했지만 할머니는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평상시와 아무것도 다르지 않았다. 할머니와 이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막상 할머니 앞에선 한 번도 들지 않았다. 할머니를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나는 말했다, "할머니, 또 오께."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으셨다. 절대 잊지 못할 할머니의 이 세상 마지막 미소였다.


할머니도 내가 숱하게 머리를 대고 누웠던 감촉을 당신의 무릎에 그대로 남겨두셨을까.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할머니 당신이 눈 감을 때까지 할머니를 사랑했던 내 마음을 기억하실까.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에 할머니는 더 이상 계시지 않다. 나 하나를 키우기 위해 애쓴 많은 사람들 중에 할머니만 만날 수가 없다.

그래도 여전히 할머니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사랑하는 마음은 슬픔도 뛰어넘나 보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 떠나간 사람들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다. 내 마음속 할머니는 내가 할머니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그대로일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진정한 사랑은 마음속에 들어온 이를 언제까지나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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