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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Oct 06. 2022

횡재한 날

아침부터 기분이 꿀꿀했다.

시차와 생활리듬의 파괴로 인해 몰아 자고 몰아 깨어 있는 날이 반복되다가, 어제는 급기야 열한 시간을 내리 자는 불상사를 빚었다.

눈을 뜨자마자 오랜 수면 끝의 묵직한 두통이 느껴졌다. 아침인지 밤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곧 불쾌감으로 이어졌다.

무거운 몸을 부스스 일으켜 세수를 하고 랩탑을 펼칠 때까지도 잠이 깨지지 않아 멍했다. 커피를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 사이 부옇게 새벽 창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하루가 시작되는 새벽 시간에 짜증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서서히 몸과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엉뚱하게도, 이럴 때가 바로 단 걸 먹어야 할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근처 도넛 가게에 커피와 도넛을 주문했다.


나는 사탕이나 초콜릿, 도넛 같은 단 것들을 별로 즐겨 먹지 않는다. 가끔 왠지 단 게 당길 때나 오늘처럼 기분 전환을 위해 활용할 뿐이다.

돈을 지불하며 오늘처럼 일부러 단 걸 사 먹을 땐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건강에 그다지 좋을 리 없는 음식을 온갖 이유를 들어 먹고야 마는 데서 오는 양심의 찔림이다.

모기 물린 자리를 긁으면 시원하면서도 아픈 것과 같다. 마치 막장 드라마를 볼 때 느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즐거움, 그러면서도 영양가 없는 일로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자책감이나 유치한 스토리에 이토록 탐닉하는 나 자신을 향해 드는 한심한 기분과도 흡사하다.

그러나 혀에서 느껴지는 달달함이 기분을 좋게 해 주는 건 사실이라서 이 죄의식 깃들인 즐거움(Guilty pleasure)을 쉽게 포기할 수가 없다. 약간의 죄의식을 동반한 즐거움은 너무 자주 추구하지만 않는다면 일탈의 기분을 느끼게 해 주어 반복되는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30분 후 배달된 꾸러미는 여섯 개들이 도넛 두 박스였다. 우리가 주문한 도넛 두 개와는 전혀 다른 비주얼이었다.

아무래도 배달이 잘못된 것 같아 도넛 가게와 배달원에게 연락을 했다. 내 것이 확실한 커피만 마시며 답을 기다리다 남편과 나는 도넛 박스를 현관에 그대로 둔 채 잊어버렸다.

한참만에 가게와 연락이 닿아 들은 답은 자신들의 실수이니 괜찮으면 그냥 먹으라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횡재에 남편과 나는 지화자 좋구나를 불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도넛 열두 개는 우리 둘이 먹기에는 너무 많았다. 더구나 최근 급찐 살 때문에 다이어트 중인 나에게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넛 한 개에도 죄의식을 느끼며 주문했는데, 열두 개는 너무 큰 부담이라 정신 건강에도 좋을 리 없었다.

그래도 행운은 우리 것이니 다 먹자는 남편과의 열렬한 토론 끝에, 우리는 결국 아파트 오피스에 한 박스를 선물로 갖다 주었다. 맛있는 건 이웃과 나눠 먹는 게 우리네 인심이다.


내가 지불한 비용에 비해 많은 것을 얻었을 때의 기분이 이런 거구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보다 더 짜릿했다. 눈앞에서 불꽃놀이를 보듯 황홀했다.

오전 내내 도넛과 씨름하느라 두통도 불쾌감도 씻은 듯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런 횡재는 날이면 날마다 하는 건 아니지만, 매일의 삶이 선물 같이 주어지는 건 무척 감사한 일이다.

기분을 바꿀 기회가 하루에도 몇 번씩 도넛 상자처럼 오는데도 나는 정작 눈치를 못 채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일이 오고 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어느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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