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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an 18. 2023

라면 이야기

흐리고 쌀쌀한 주말.

오랜만에 찾아간 곳은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일본 라면집이었다. 일본 식품을 파는 마트 옆 푸드코트에 우동집, 덮밥집과 더불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몇 년 전 일본에서 출장 나온 남편의 지인이 일본에서도 맛있기로 유명하다고 극찬한 라면집이기도 하다.

남편과 아이들은 일본식 라면을 좋아하지만, 나는 별로 즐겨 먹지 않는 음식이다. 돼지 뼈와 고기로 우린 국물에 기름이 둥둥 떠있는 걸 처음 보고는 먹기도 전에 질렸던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 인스턴트 라면 맛에 익숙했던 나는 처음 보는 라면의 비주얼에 썩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칼칼한 맛과는 거리가 먼, 쿰쿰한 고기 냄새가 나는 뿌연 국물도 굉장히 낯설었다.

어쩌다 일본 라면을 먹으러 가면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덮밥집 옆 한국 음식점에서 비빔밥을 사 먹곤 했다. 가족들은 이런 나를 우주 괴물 보듯 했다.


일찍 집을 나서서 그랬는지, 늘 길게 늘어서던 줄이 서너 명 정도밖에 안 됐다. 날씨 때문이었을까, 국물 있는 음식이 당겨서 나도 라면을 먹기로 했다.

콤보를 주문하면 라면과 밥이 함께 나온다. 라면은 대, 중, 소, 세 가지 크기가 있고, 밥과 라면국물 종류도 각각 네 가지가 있어 그중 선택을 해야 한다. 꽤 복잡한 주문표를 도표로 만들고 번호를 붙여 놓아서 원하는 메뉴를 고르기가 한결 쉽다.

나는 간장을 베이스로 한 국물의 라면과 낫또를 얹은 밥, 그리고 달걀조림이 같이 나오는 콤보를 주문했다.


라면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판매된 것은 1963년이었다. 그때 라면의 가격이 10원이었다고 한다. 그 후 오랜 세월 라면은 배고픈 서민의 벗으로, 비상식량으로, 누구나 좋아하고 쉽게 만들 수 있는 간식으로도 우리 생활에 확실한 자리매김을 해 왔다.

초등학교 때 엄마가 종종 데려가던 분식집의 떡라면, 고등학교 때 라면에 양파 넣는 걸 좋아하는 친구가 끓여주던 양파 한가득 라면... 내게도 잊을 수 없는 라면들이 있다.

시험 공부 하다가 툭하면 동생과 라면을 끓여 먹던 일도 생각난다. 주무시는 엄마 아빠가 깰까 봐 살금살금 까치발로 끓이던 라면은 밤에 먹어 더 맛있었다.

고등학교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먹던 컵라면도 잊을 수 없다. 겨울이면 교실 난롯가에 친구들과 모여 앉아, 매점에서 사 온 컵라면에 더운물을 나누어 붓고 도시락 밥을 말아먹었다. 친구들과 수다를 반찬 삼아 먹던 컵라면은 몸과 마음까지 따뜻하게 덥혀 주곤 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 'C 분식'이라는 분식집이 있었다. 라면 한 그릇이 200원이던 시절 C 분식의 메뉴는 딱 한 가지, 라면이었다.

가끔 청소나 학급 일을 늦게까지 하고 출출할 때, 배뿐만 아니라 친구와의 이야기가 고플 때, 우리는 아꼈던 용돈을 들고 C 분식으로 달려가곤 했다. C 분식은 우리 학교 학생들로 늘 북적거렸다.

6학년 어느 날, 나는 친한 친구 Y와 C 분식에서 라면을 먹으며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입가에 라면 조각을 묻혀가며 열변을 토하던 친구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나는 국물에 코를 적실 기세로 열심히 먹던 라면 그릇에서 고개를 들어 친구를 쳐다보았다. 잔뜩 찌푸린 Y의 얼굴에 깜짝 놀라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순간, "아줌마!" 친구가 분식집이 떠나가라 사장님을 불렀다. 쟁반에 담긴 라면 그릇을 정신없이 나르던 사장님은 "왜?" 바쁜데 뭐냐는 얼굴로 다가왔다.

친구는 자신의 라면 그릇을 가리키며, "이거 뭐예요? 이거 파리잖아요!" 했다. 반쯤 먹은 친구의 라면 그릇엔 파리 한 마리가 동동 떠 있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당황한 기색이 뚜렷한 사장님은 갑자기 국물 속에서 파리를 건져내더니 자신의 엄지와 검지로 쓱쓱 비비며, "이게 무슨 파리야, 김이지. 봐, 김이잖아."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가락에서 짓이겨진 검은 덩어리를 옆 테이블에도 보여주며, "학생들, 이게 파리로 보여?"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라면을 먹던 아이들이 어안이 벙벙해 우리와 사장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친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에잇, 다신 오나 봐라!" 하더니 내게 "가자!" 말하고는 그대로 문을 향해 앞장서 걸어갔다. 우리는 라면 값을 계산하지 않은 채 분식집을 나왔다.

사장님은 우리를 잡지도 않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 분식집에선 라면에 김가루를 넣어주지 않는다는 걸.


파리를 빚어 김가루를 만든 사장님을 그때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미안하다고 말했다면 사장님은 우리에게 괜찮은 어른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어린이도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항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친구의 단단한 모습에서 배웠다. 혀 끝에 남아있던 먹다 만 라면의 맛은 아쉬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걸 알았다는 생각에 제법 뿌듯하던 마음이 생각난다.


요즘은 누가 끓여준 라면보다 내 취향대로 직접 끓인 라면이 맛있다.

나는 라면에 떡을 넣어 먹는 게 좋다. 라면 수프 맛이 밴 쫄깃쫄깃한 떡과 꼬들꼬들한 면은 마치 잘 어울리는 연인 같다.

언제부터 떡라면이 좋았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옛날 엄마가 자주 끓여주셔서인 듯하다.

추억 때문에라도, 라면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스러운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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