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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Mar 16. 2023

삶, 그 찬란함에 대하여

<더 글로리>를 보고

그들은 여전히 함께였다. 

부모의 돈과 권력이라는 탄탄한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약자를 괴롭히고 짓밟던 그들은 학교를 떠나서도 열여덟 해 동안 함께였다. 서로 어울렁 더울렁 엮여 살고 있었다. 뿔뿔이 흩어지는 게 자신들의 뻔뻔한 범죄를 덮기에 더 편했을 텐데 그들은 왜 여전히 함께였던 걸까.

자신들이 저지른 짓이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할 만한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숨거나 감출 필요를 못 느끼고 당당하게 어울려 살아온 것이다. 사람은 여간해선 변하지 않는다.

복수를 계획한 사람 입장에선 모두 모여있는 이들을 한 무대에 올리기에 한결 유리했을 것이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작가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학교 폭력'과 '복수'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이 이야기는 학교 폭력을 당한 주인공이 훗날 가해자들에게 되갚아 주는 처절한 복수극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 드라마에서 다른 복수극과는 구별되는 메시지를 읽었다.

첫 번째 파트에서, 끔찍한 폭력의 피해자인 동은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학교, 경찰서 등 우리 사회 정의의 표본과도 같은 곳에서 일하는 어른들이 그녀를 외면한다. 엄마에게조차 버림받은 어린 소녀는 복수를 결심함으로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두 번째 파트에서는 장막에 가려져 있던 인물들이 나타나며, 동은의 주위엔 그동안 나쁜 어른들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동은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조력자들이 그녀 곁에 있었던 것이다. 동은에게 신의 개입이란, 자신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돕던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동은은 복수의 장을 공들여 준비하고 마침내 막을 올렸다. 무대에 밝힌 조명은 때로 스포트라이트로 가해자 각각을, 때로 스트립라이트로 모두를 비췄다.

드라마 뒤편으로 갈수록, 무대 위에 올려진 다섯 명의 가해자는 연출자의 별다른 지시 없이도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욕보였다. 동은이 복수를 계획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쩌면 그들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갔을지 모를 일이다.

가진 게 많으면 잃을 것도 많아진다. 손에 쥔 게 많으면 많을수록 아무것도 놓고 싶지 않은 게 사람의 욕심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 중 어느 하나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거짓을 말하고 배신과 폭력을 저지른다.

우리에게 '만족'은 영원히 불가능한 상태인지도 모른다. 만족의 지점에 도달하자마자 새로운 불만이 다시 시작된다. 기쁨도 행복감도 결코 허용하지 않는 세계가 바로 욕심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점점 커져 마침내 온통 우리의 세계가 돼버리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는 보지 못하면서, 손에 움켜쥔 것들 앞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눈이 밝아졌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남의 것을 빼앗은 데엔 단 한 줄기의 양심도 작용하지 않았다. 그 발버둥은 살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스스로 파놓은 구덩이로 자신을 점점 더 밀어 넣는 죽음의 몸부림이 되고 말았다.


반면, 동은은 삶을 놓으려던 순간을 넘어 복수를 위한 어둠을 살지만 그 캄캄함 속에서 점차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남편에게 맞고 사는 강현남 캐릭터는 이 드라마의 인물들 중 내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다. '매 맞지만 명랑한 여자' 현남은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지도 도망치지도 않는다. 마치 스스로를 구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씩씩하게 삶에 마주 선다. 무너질 듯 위태로운 순간에도 결코 자기 자신을,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명랑함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다.


나에게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과 복수를 뛰어넘어, 인간 본성과 삶의 처절함을 드러내 준 드라마였다.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 약자와 강자의 구도가 아닌, 우리 삶의 본질과 세상의 모습을 더 넓고 더 깊게 들여다 보라는 일침이었다.

그늘진 곳에 서있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연대와 사랑은 이 드라마를 통해 내게 속삭여 주었다 ⎯ 절망만 하지 말고 희망을 보라고, 다행히 우리 안에 심겨 있는 사랑이 있어 세상은 아직 살아갈 만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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