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랫동안 오렌지 빛에 가까운 머리카락 색을 고수해 왔다.
서울에 갔을 때 엷은 브라운으로 물들인 게 시작이었다.
색이 바래어 예전 톤을 잃어버린 채, 짧은 쇼트커트 스타일이 등에 닿는 긴 머리가 될 때까지 2년이 흘렀다.
살면서 긴 머리카락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다. 결혼식 준비 때문에 머리를 길렀던 적 한번, 그리고 둘째 낳고 바쁘게 사느라 머리를 자르지 못했던 적 딱 두 번 빼곤 늘 짧은 머리였다.
내 머리카락은 못 말리는 반곱슬이다.
길어질수록 더욱 자유롭게 각자의 길을 찾아 이리 뻗치고 저리 뻗치는 내 머리카락들을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극히 가늘고 중력의 영향을 거부하는 머리카락을 가진 덕에, 귀밑 1센티미터 길이를 지켜야 했던 중학교 때는 자주 머리를 자르지 않아도 됐다. 머리카락이 말려올라가 제 길이보다 훨씬 짧아 보였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때까지 대부분 단발머리였고, 대학 시절에도 중간길이 이상 머리를 길러본 적이 없다. 섣불리 길렀다간 흔히 '미스 코리아 머리'라고도 불리는 사자머리가 되기 딱 좋았다.
비가 오거나 머리를 감고 나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르는 머리 모양 때문에 너무 속이 상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찰랑찰랑 생머리를 가진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면서 남의 속도 모르는 '파마 값 안 들어 좋겠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땐 다른 아이들처럼 아침에 엄마가 머리를 묶어준 기억이 거의 없다. 어쩌다 내 머리를 묶어주다가도 예쁜 모양이 나오지 않으면 엄마는 내 머리카락 탓을 하며 짜증을 내곤 했다. 반곱슬 머리로 태어난 건 내 잘못이 아님에도 나는 꽤 오랫동안 내 머리카락이 남들과 달리 몹시 이상한 줄만 알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머리카락은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의 한 부분을 묵직하게 차지해 왔다. 그래서 나는 될수록 짧은 머리 스타일을 고집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치렁치렁 긴 내 머리가 어색한지 아이들과 남편은 오래전부터 머리를 자르라고 성화였다. 가늘고 긴 머리카락이 툭하면 엉겨서 빠지는 게 아까워서라도 잘라야지 했지만, 막상 자르려니 왠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차일피일 미루던 나를 답답해하던 딸, 덜컥 미용실 예약을 해버렸다. 그렇게 끌려가다시피 한 곳은 도심 한복판의 조그만 일본 미용실이었다.
내 머리를 담당한 헤어디자이너는 영어를 거의 쓰지 않고 다른 직원의 통역을 빌어, 내가 원하는 스타일과 색을 감잡아 보려 했다. 그는 매우 부드럽고 친절한 손길로 머리를 잘라주었다.
그가 미국에 온 지 넉 달이 됐고, 한국을 좋아하는데 한국말은 어려워하며, 그가 일하는 미용실은 일본에만 스물여섯 개의 체인을 가진 꽤 괜찮은 곳이란 것도 단어만의 소통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2년을 내 몸의 일부로 있던 머리카락은 사정없이 잘려나갔다.
만일 머리카락이 신경과 연결돼 있어 가위가 지날 때마다 아픔이 느껴진다면 머리 자르는 일이 고행이 됐거나 머리를 자르기 위해 마취를 해야 할 거다. 신의 인간창조는 그가 보시기에 좋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도 좋다.
헤어디자이너의 도움으로, 나는 내 눈동자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과 곱슬머리의 특징을 살린 층진 짧은 머리를 갖게 됐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달라지니 왠지 마음도 달라질 것 같았다.
변심 후 변신이 예전의 질서였다면, 지금은 변신 후 변심인 거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 했던가. 여자고 남자고 변신이 죄는 아닌데 왜 이런 말이 생겼나 모르겠다.
변신은 파티다. 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