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a Lee Apr 17. 2023

지하철에서

종잡을 수 없는 날씨. 흐리다 개다 비가 흩뿌리는가 하면, 숱 적은 내 눈썹도 휘날릴 것 같은 바람이 분다. 완연한 봄을 위한 진통인가 보다.

주말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 북적이는 관광객들 틈에서 햄버거도 사 먹고 커피도 마셨다.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에 올라 마침 빈자리에 앉았다.

출발한 지 5분 정도 됐을까. 갑자기 덜컹 지하철이 섰다.

역이 아닌 선로 위에 서버린 전동차는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캄캄한 벽이 보인다기보다 느껴졌다.

곧 출발하겠지 했는데, 멈춘 채 흐르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안내방송도 없었다.

삼십 명쯤 되는 객차 안 사람들은 별 동요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옆 좌석의 청년들은 가끔씩 서로 장난도 치며 떠들고 있었고, 맞은편 좌석의 아이는 여전히 게임 삼매경이었다.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그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잠시 후 방송으로 기관사들끼리 주고받는 듯한 통신이 흘러나왔다. 전동차가 갑자기 섰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조사 중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What's going on', 뭔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이 말이 좀 공포스럽게 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은 걱정을, 걱정은 무서운 상상을 만들어냈다.

이게 만약 큰 사고의 전주곡이라면.

신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뒤에서 다음 전동차가 다가온다면.

이러다 전기가 끊어져 암흑천지가 된다면.

그리고 가장 무서운 건, 지하철이 멈춰 선 자리가 맨해튼과 퀸스를 잇는 이스트 강 아래라는 것이었다.

노후된 뉴욕 지하철 상태를 보며 지하철이 고장 나는 상상을 한 번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깊고 깊은 강바닥 아래 갇히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답답한 10여 분이 흘렀을 때였다.

기관사 중 한 명으로 보이는 주황색 안전조끼를 입은 여자가 객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우리 객실을 통과해 옆 객실과의 사이에 있는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녀가 비추는 손전등 불빛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두어 번 부르릉 진동이 느껴졌으나 움직임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에 서서히 긴장과 불안이 떠돌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자리에 앉지 못하고 왔다갔다 객실 안을 돌아다니던 한 여자는 급기야 문 앞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가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방이 막힌 지하, 강바닥 밑에서 움직일 줄 모르는 지하철, 산소는 충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대로 물이라도 새어든다면 살아서 바깥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너무 슬퍼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새로 이사한 집이 그리웠다. 집에 돌아가 햇살 가득한 창가 화분에 이제 막 피어난 꽃을 다시 보고 싶었다.

브런치스토리에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아직 남아있는데, 이대로 끝이라면 너무 아쉬웠다.

여전히 무서웠지만, 최악의 순간이 온다 해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이상하게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다시 객실로 들어서는 기관사가 보였다. 괜찮은 건지 누군가 묻는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휴, 곧 출발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모두 운이 좋았어요."

5분 후, 거짓말처럼 전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명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나도 모르게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왔다.

다음 역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지하철에 오르는 사람들의 평온한 얼굴을 보고서야 완벽한 안도감을 느꼈다.


지하철에서 내려 바라본 거리의 풍경이 아침과 달라 보였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더 아름답고 더 선명했다.

산책을 하고 장을 보고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알았다.

화 내고 미워하고 절망하는 부정적인 감정들에 시간을 빼앗기기엔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걸 깨달았다.

지하철에 갇혀 있던 30분, 마치 다른 시간을 여행하고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게 더없이 행복했다.

이전 17화 변신, 변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