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고
브런치가 멈춘 지난 주말 보기 시작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사흘 동안 몰아 보았다.
무슨 괴상한 반항심인지, 남들 다 보고 감동받고 그 감동의 여파로 글과 패러디와 유행어가 한바탕 쏟아져 나온 후 더 이상 아무도 그 드라마나 영화를 언급하지 않을 때쯤 보고 싶어 진다.
이번에도 그랬다. 주위에서 함께 보자고 권유받을 땐 벌여놓은 일이 많았고, 보고 싶어 졌을 땐 여행이 코앞이었다.
브런치가 <우리들의 블루스>를 내게 데려다준 셈이 되었다. 어찌 됐든 요란한 뒷북이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당장 제주도로 달려갈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제목의 '블루스'는 음악이나 춤의 장르를 일컫지만, 내겐 제주의 파란(blue) 바다 빛이 자꾸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한편 'blue'는 슬프거나 우울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각자 슬프고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우울해질 법도 한데, 다 보고 나서 우울하긴커녕 살아갈 힘을 내게 되는 건 왜일까.
영옥과 영희의 이야기는 그 후 다른 에피소드들을 보는 동안에도 유독 내 마음을 놓아주지 않았다.
영희가 누구인지 알고 나서야 영옥이 왜 그렇게 혼자 있고 싶어 했는지 이해가 갔다. 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난 영희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나자 오롯이 쌍둥이 동생 영옥에게 남겨진다.
영옥은 몇 번이나 영희를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마음으로는 더 많이 버렸을지 모른다. 그런 영옥을 영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영희가 평상에서 담요를 둘러쓰고 울며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그런 영희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릴 때 지하철에서 영옥이 자신을 버렸던 일도 다 기억하고 있다.
장애가 있지만 살 집과 보살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영희는 영옥이 꼭 가까이 있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영희가 영옥을 붙드는 건 영옥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결국 둘 다 서로를 버리지 못한다.
영옥 영희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은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젖힌 커튼 사이 새어 들어온 빛에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는 영희의 그림들. 영옥은 오열한다.
영희가 나이별로 차곡차곡 그린 영옥의 얼굴들, 그리고 영옥과 영희가 함께 있는 그림의 제목은 '영희 영옥 서로 사랑하다'였다.
"대체 사람이 얼마나 외로우면, 얼마나 보고 싶으면 이렇게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건지..." 영옥의 독백이 이어진다. 버리고 싶던, 그로부터 놓여나고 싶던 사람이 자신을 지금까지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어린 시절 내가 떠올랐다.
엄마가 화를 내고 혼낼 때도, 날 며칠씩 외가에 맡기고 동생만 보살펴 줄 때도, 내 마음을 외면하고 내 말을 잘 들어주지 않을 때도, 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대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면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야속하지 않은 걸까.
세월이 흘러 두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나는 마음을 다해 내 아이들을 사랑해야지 다짐했다. 그리고 자식을 사랑하는 어미의 마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그런 내 생각을 바꿔 주었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미의 마음 못지않게 어미를 사랑하는 자식의 마음도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었다.
아이 키우는 게 힘들고 아이가 피우는 말썽에 대해 화가 날 때도 아이는 나를 사랑했다. 옆에서 보면서도 늘 나를 그리워했다. 단 한순간도 사랑을 놓지 않고 붙든 건 아이였다. 그리고 아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내게 세상을 살아갈 힘이 돼주었다.
내가 하는 사랑만 생각했지 내가 받는 사랑은 잊고 살았다. 누가 내 아이만큼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사랑은 그런 것인가 보다. 진짜 마음, 깨끗한 마음, 그리움 말이다.
이 세상 작은 기적들은 모두 사랑이 깊어 생긴 그리움이 만든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