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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l 22. 2022

남편의 눈물

30년을 함께 살며, 며칠 전 남편의 세 번째 눈물을 보았다.


남편의 눈물을 처음 본 건 결혼하고 첫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였다. 무슨 일로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신혼의 밤을 하얗게 불태운 말다툼이었다. 아니, 말다툼이라기보다 내가 일방적으로 따졌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남편은 원래 말수가 적다. 그리고 브리핑의 명수다. 지인과 통화를 한 후 무슨 얘기 했냐 물으면 "안부와 일" 이런다. 그게 다냐 물으면 그게 다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니 더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남편에게 책이나 영화의 내용을 묻는 걸 포기한 지 오래다.

남편은 내 질문의 포인트를 모를 때도 많다. 어느 날 퇴근길에 초콜릿이 잔뜩 든 쇼핑백을 들고 왔길래 "이게 뭐야?"하고 물었더니 "초콜릿" 이런다.

"누가 초콜릿인  몰라? 어디서  거냐는 질문이잖아." 답답함에   정도 올라간  목소리. 그제사 남편은 "오늘 오피스에서 누가 선물 돌렸어" 한다. 남편과의 대화는 대충 이런 식이다.

처음으로 부부싸움을 한 그날,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거실에 나와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낮고 규칙적인 소리였다. TV 볼륨을 줄이고 귀 기울여 보니 그 소리는 남편이 있는 방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좀 전에 싸운 것도 잊고 호기심에 문을 열어보았다.

맙소사, 남편이 울고 있었다. 그것도 "어흐흑"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이따금씩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는 게 엄마한테 혼나고 우는 아이 같았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르고 문 앞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나중에 왜 울었냐고 물어보니 너무 억울해서 그랬다나. 내 오해를 풀긴 풀어줘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가슴은 답답하고 말은 안 나오고, 그저 눈물만 나오더라는 것이다.


남편이 결혼하고 두 번째로 눈물을 흘린 건 17년 동안 다닌 회사를 그만두던 날이었다.

우리는 대학 4학년 때 처음 만났다. 연애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내 남자 친구, 지금의 남편인 그는 군대에 갔다. 집에서 출퇴근하는 방위병이긴 했지만 취사병이라, 밤늦게 퇴근하는 남자 친구를 만날 시간은 주말밖에 없었다. 제대 후 졸업을 몇 달 앞두고 동갑내기 남자 친구는 회사에 취직을 했다. 나와의 결혼 허락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젊은 날을 모두 바친 회사를 그만두던 날, 남편은 회사 선배와 통화하다가 그를 형님이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나한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후다닥 방을 나가던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힘든 사회생활을 감내해내는 남자들의 마음을 남편의 그 모습에서 왠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전 남편의 세 번째 눈물을 보고 말았다.

주말 오후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남편이 자꾸 코를 훌쩍거렸다. "감기야?" 묻는 내 말에 대꾸도 안 하고 계속 훌쩍였다. 이상해서 가까이 가보니 맙소사, 남편이 울고 있었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였다. 눈물범벅에 코와 귀가 온통 빨간 남편의 얼굴을 결혼하고 처음 보았다. 깜짝 놀라 남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남편이 보고 있던 건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였다. 많은 친구들이 권한 드라마라 나도 보고 싶었지만 여유가 안 생겨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중이었다. 남편은 주말 내내 열 개의 에피소드를 눈물 콧물 흘려가며 몰아 보았다. 그는 평소 드라마를 즐겨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눈물을 쏟아가며 드라마를 몰아 보는 모습은 생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얼레리 꼴레리~" 내가 놀리자 남편이 울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웃던 남편의 얼굴을 표현할 말이 내겐 아마도 없지 싶다.


몇 주 전 둘째 딸이 방학을 맞아 집에 왔었다. 남편과 셋이 빵을 사러 갔는데, 카운터의 청년이 계산을 마치며 남편에게 "Thank you, ma'am." 이러는 거다. 이발한 지 오래되어 텁수룩한 머리에 얼굴 가득 마스크를 한 아담한 키의 남편을 아줌마로 잘못 본 것이다. 딸과 나는 웃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빵 집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눈물이 많아진 남편, 게다가 아줌마라는 호칭까지 얻은 남편. 나는 이제야 진정한 동지를 만난 기분이다. 왠지 앞으로는 남편과 말이 더 잘 통할 것 같다.

어쩌면 남자들은 실컷 울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남편이 앞으로는 울고 싶을 때 맘껏 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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