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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Aug 16. 2022

수제비

다른 주에 살고 있는 첫째 딸, 둘째 딸과 서울에서 만나게 되었다. 아이들과 3개월 만의 재회다.

남편과 나는 작년 여름에 서울에 왔었지만, 아이들은 팬데믹 이후 처음이다. 둘째는 방학이라 괜찮은데, 첫째는 회사 때문에 당연히 시간이 안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휴가 1주일을 제외하곤 시차 때문에 밤새 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첫째는 이번에 꼭 서울에 오고 싶어 했다. 그리고 하루 차이의 비행으로 우리는 서울에서 만났다. 3년 만의 서울 방문은 아이들을 몹시 들뜨고 행복하게 했다.


엊그제 아이들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던 익선동에 갔다. 골목골목 고풍스러운 한옥에, 마치 할머니 품 안에 쏘옥 들어앉은 아이처럼 자리한 예쁜 가게들이 인상적이었다.

더위에 지친 우리는 조금 걸으면 닿는 인사동에서 전통 차를 마시기로 했다. 어느 찻집을 갈까 고르던 중 남편이 한 찻집을 가리키며 내게 "저기 며칠 전 우리 갔었던 데, 생각 안 나?" 이랬다.

남편은 그 전날에도 한 찻집을 가리키며 내게 똑같이 말했었다. 그 찻집은 각기 다른 장소에 있는 프랜차이즈 중 하나였다. 남편은 이름이 같은 찻집을 보고 우리가 갔던 바로 그 장소라고 착각을 했던 것인데, 기억력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는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다시 2차전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또 착각을 한 건지 아니면 말을 아끼는 편인 그가 프랜차이즈라는 말을 생략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 장소에 가본 적이 없다는 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부득부득 우기며 지리에 약한 나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이 무슨 중년 동갑내기 부부의 이겨먹기 경쟁인지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날은 덥고 그 전날의 기억 때문에 '또야?' 짜증은 슬슬 발동을 걸고, 나도 모르게 말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아니거든!"

그때 큰 딸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엄마는 좋게 말해도 되는데 왜 짜증을 내?" 하고 말했다.

순간 밀려오던 짜증이 휙 등을 돌려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서러움이 들어섰다.


우리는 말없이 들어간 찻집의 한쪽 귀퉁이 자리에 앉아 차를 주문했다.

분위기는 폭풍전야였고 둘째와 남편은 나와 첫째의 눈치를 보느라 침묵하고 있었다. 자신이 한 말이 이상한 결과를 초래한 게 머쓱했던지 남편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첫째가 내게 미안해하는 남편의 마음을 눈치채고는 "엄마, 미안해.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했다.

나는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남편이 나를 모욕하거나 딸이 나를 심하게 비난한 것도 아닌데, 딸의 사과를 향해 열려야 하는 내 마음 안에는 이미 과거의 상처들이 올라와 가득했던 것이다.

어릴  동생하고 싸워도   보고만 '참아라, 동생을 감싸줘야지' 하던 부모님의 얼굴,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책임져야 하거나 다 같이 벌을 서야 했을  아무 감정이 읽히지 않던 차가운 선생님의 표정, 결혼  부부싸움을 하고 엄마한테 하소연했을  남의 자식 편들며  혼내던 엄마의 목소리, 아이들 어릴  회사 , 술자리로 바쁜 남편 얼굴 보기 힘들어 혼자 감당하는 육아가 지친다고 말했을  '여자가...' 운운하며 일축하던 시어머니의 눈빛이 마음에 가득  딸의 사과를 받을 자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작은 위로의 말 한마디가 어째서 나한테만 그렇게 인색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억울함을 떠나, 언젠가부터 세상에 내 편은 아무도 없다는 위로받기를 포기한 상태로 살아왔다.

이젠 그만 참고 그만 감싸주고 싶다. 이젠 누가 내 마음 좀 알아주고 내 편 좀 들어주면 좋겠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래, 그럴만하지" 하고 말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분위기가 더 어색해진 채로 우리는 저녁을 먹을 식당을 찾고 있었다.

마침 옛날에 가봤던 수제비집이 가까이 있어 들어갔다. 원래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붐비는 곳인데, 이른 저녁 시간이라 그랬는지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운 좋게 하나 남은 테이블을 차지한 우리는 곧 나온 항아리 그득한 수제비와 파전을 먹었다.

수제비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을 보고 있으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나는 국자로 수제비를 떠서 아이들과 남편에게 나누어 주었다. 입이 짧은 첫째도 내가 떠주는 수제비를 세 그릇이나 비웠다.

"엄마 여기 20년 전에 왔었어. 근데 맛이 하나도 안 변했네."

따뜻한 국물과 부드러운 수제비와 그 한결같은 맛에 내 마음은 어느새 입 안에서 녹는 수제비처럼 스르르 풀려버렸다.


다 먹고 식당을 나서는데 첫째가 슬그머니 다가와 내 손을 잡는다. 더 이상 사과를 받아들일 일도 사라지고, 올라왔던 깊은 상처들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좀 나아진 줄 알았는데, 많이 잊은 줄 알았는데, 툭 건드려지기만 해도 다시 힘든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나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여전히 그 아픔 한 조각을 놓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데 예전의 나라면 수제비 국물에 상처를 녹이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빨리 힘든 기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을 앓으며 바닥을 치고서야 괜찮아졌던 예전의 나는 이제 옛날 먹었던 수제비의 여전한 맛에 반해 아픔을 행복감으로 바꿀 수 있는 내가 되었다.

이렇게 조금씩 성장해 가는 거겠지. 이렇게 나 자신을 감싸주면 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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