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테비 Apr 13. 2024

물렀거라, 歲畫(세화) 나가신다.

갑진년 새해맞이 특별 세화전

세화(歲畫) : 조선 시대에, 새해를 축하하는 뜻으로 대궐 안에서 만들어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 주던 그림.


글을 쓰려고 들어왔다가, 목차를 한 번 봤다. 임의로 만들어 놓은 목차라 신경 쓰지 않고 쓰지만, 목차와 내 글의 간극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임의로 써 놓은 목차에 ‘인사동 한지’로 되어 있네. 세화전을 쓰고 한지 이야기를 쓰려고 계획을 잡았던 모양이군. 한지, 붓 이야기는 이미 썼으니 세화전으로 얼추 비슷한 회차를 따라가고 있다고 혼자 중얼거린다. 그럼 세화전 이야기 스타뜨!!


화실을 다니고 두 번의 새해를 맞이했다. 재작년 연말쯤에 화실에서 몇몇 회원들과 선생님께서 토끼가 그려진(들어간) 그림을 그리고 있다. 토끼 이미지가 그렇듯 하얗고 귀엽고 깔끔한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펼쳐져 있다. 세화전 준비라고 했다. 아, 세화전. 새해맞이 그림인가 보네 정도로만 생각했다.


올해는 그야말로 청룡의 해다. 이런 해를 누가 짓는지 모르겠지만 눈만 돌리면 청룡 그림들만 보일 태세다. 토끼와 달리 용은 민화와 잘 어울리는 그야말로 예스럽고 이쁘지 않은 분위기로 여겨진다. 웅장하기만 한 그런 느낌이랄까. 화실은 올해도 세화전에 참여한다. 세화전이 이만큼 중요한 전시일 줄이야. 그림 크기도 정해져 있고, 대부분 창작 위주로 참여한다고 했다. 세화의 의미를 찾아봤다. 새해를 축하하는 뜻이니까. 우리끼리 새해맞이 축제 같은 즐기는 전시회구나. 재밌겠다, 얏호!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냐만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니까 감이 멀다.


그러나 SNS 연말 분위기를 떠올려 보자. 크리스마스 시즌부터 연말연시 따뜻한 글, 사진, 감사편지,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개인만의 의식(?) 같은 것들이 잔뜩 올라온다. 나는 책스타그램답게 책탑을 쌓아한 해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달력을 나눠주고 구입하고. 비록 먼 곳이라 커다란 계획을 세워 방문하는 축제 세화전도 일종의 연하장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디, 우리도 축제를 즐겨볼까. 이번에는 선생님이 우리를 진두지휘 하며 끌었다. 그야말로 프로젝트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와인, 연말연시 선물 달력, 나만의 한 해 마무리 책탑.

작년 회원전에서 선생님께서 <전채용신 팔도미인도> 중 한 그림을 모사했다. 미인을 그리고 나니 허전해서 개구리(?) 두꺼비(?)를 한 마리 그렸다. 영롱한 풀색에 등 무늬까지 넣고 나니 그림의 포인트로 눈에 확 들어왔다(영롱한 풀색이니 확실한 개구리다). 동화에 나오는 개구리 왕자라고 말했다. 여기서 번뜩! 선생님이 내년 회원전에 <팔도미인도>를 그려보자고 했다. 벽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다. 각각의 회원들의 작품이지만 전체를 모으는 공통분모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겠다.


<팔도미인도> 기획을 세화전으로 앞당기기로 했다. 세화전은 그 해의 띠 그림인 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는데, 팔도미인도를 그려도 되나요? 물었다. 선생님의 큰 그림. 거기에 노리개를 하나씩 넣어서 노리개 위에 용을 넣자. 옥색빛의 청룡을. 임금께 하사 받은 용의 의미로. 역시 예술하는 사람. 이런 게 창작으로 구만. 혼자 속으로 감탄했다. 선생님의 스토리텔링에 살이 붙는다. 미인을 현대판으로 바꿔보자. 개구리를 넣어 개구리 왕자라고 한 것처럼 누가 봐도 아! 저 미인은 누구구나, 하고 알 수 있는 캐릭터로 표현해 보자. 동화 속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렇게 우리는 백설공주, 라푼젤 등으로 구성했다. 선생님 포함 8명이 꾸려졌고 각자 캐릭터를 선택했다. 우리 8명 중에 자녀가 5명인 최대 다둥이 회원이 계신다. 그분은 캐릭터를 따로 정하지 않고 5마리 드레곤을 넣기로 했다. 한복 입은 미인에 5마리 용이라니. 올해 받을 수 있는 용의 기운 다 받아갈 분위기겠는데.


내가 선택한 그림은 허리쯤의 치마폭이 펑퍼짐한 그림(왼쪽에서 3번째 그림)이다. 코카콜라 몸매, 도자기 몸매처럼 곡선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한쪽 손은 가채를 만지고 있으니 요염 그 자체다. 그걸 본 순간 <안나카레니나> 소설이 생각났다. 김영하 작가가 종종 얘기해서 더 유명한 책이고, 첫 문장이 유명한 책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창이 넓은 모자 예시 사진(윤고은 작가님 죄송합니다.)

가채 위에 창이 넓은 모자를 넣고 망사 재질 흰색이나 검은색 장갑을 낀 모습을 상상하며 ‘안나카레니나’로 할게요라고 했다. 선생님이 안 된단다.  

- 그래요?

- 안나카레니나는 안녕, 테비 님 같은 회원들이나 떠올리지 일반인은 떠올리지 못하잖아요.

- 아하!


떠오르는 캐릭터가 없어서 도서관 가서 책을 찾았다. 세계 명작 동화 캐릭터가 뭐가 있더라. 소공녀, 키다리 아저씨, 아씨들. 죄다 그런 것들만 떠오르는지. 며칠 고민했다. 뭐 있지? 뭐 있지? 요염하면서 도도하지만 강한 이미지로 보이지 않는. 그런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었다. 자려고 누웠다가 유레카! 를 외쳤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빨간 머리 앤>. 나에게 네가 있었는데 잊고 있었네. 키다리 아저씨 주인공도 좋지만 캔디 이미지는 싫으니까. 그래! 너야 너! 칠판으로 길버트 머리를 칠 수 있는 빨간 머리 앤. 밀당할 줄 아는 너. 문학을 좋아하는 너. 선생님이 책을 시그니처로 써보라고 얘기했으니.

너로 정했다!!


문제 해결 하고 나니 잠이 솔솔 밀려온다. 체증이 내려가는 감각을 느끼며 편안하게 꿀잠 잤다. 각자 그림을 그리고 노리개 색을 정하기 위해 8명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중간 점검을 했다. 애플 노트북을 들고 있는 백설공주, 빨간 가채를 하고 있는 빨간 머리 앤, 곧 마차가 될 호박 한 덩이와 함께 서 있는 신데렐라, 머리를 땅까지 길게 늘어뜨린 라푼젤, 노란 드레스 상징인 미녀 벨(야수는요?). 아기공룡 5마리 엄마, 공주 하면 빠질 수 없는 인어공주는 거북이를 늠름하게 호위무사로 두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출발이었던 개구리 왕자를 만난 미녀까지. 8 작품을 테이블에 늘어놓고 나니 재미있고 거창하고 풍부했다.

우리끼리 축제는 바로 지금 여기다. 다들 잘 그렸다는 독려도 있지만, 각자 풀어놓는 아이디어를 들으니 전시회장이 따로 없다. 아직 미완이지만, 날 것 그대로 그림이라 더 즐거웠다. 의자를 밟고 올라가 사진을 찍는 모습이며, 의자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체 그림은 전시회에 가지런히 걸린 그림보다 더 생기가 돋는다. 찰칵찰칵 셔터음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웃음소리와 감탄사는 끊이지 않는다. 난 이날, 내 그림에 처음으로 만족했다. 요가 시리즈를 그리고, 아트페어를 위해 일러스트를 한참 찾아보며 고민한 시간들이 빨간 머리 앤을 찾는 시간보다 몇 배는 더 오래 걸렸지만, 빨간 머리 앤을 보는 순간 막힌 가슴이 뚫리며 긴장이 확 풀어지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는 순간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빨간 가채 하나로만 포인트라고 하기엔 부족해 빨간 머리 앤이 어느 날 교회 가는 날 데이지 꽃 모자. 그날의 앤은 데이지 꽃을 모자에 둘렀다가 목사님께 혼나서 집으로 돌아와 씩씩 거리며 일기를 썼다. 숙녀가 된 빨간 머리 앤이 들었던 가방까지. 한복과 통일감 있는 색깔, 한지 색까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작품이다.


이 연재북의 표지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1부에서 3부까지 진행된 세화전에 지방에서 올라가야 하는 우리는 마지막 3부에 참여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8명의 그림이 눈에 뜨였는데, 우리만의 착각이 아니길. 당일에 서울 가서 모두 함께 하기로 했지만, 각자 사정에 따라 먼저 간 사람도 늦게 내려오는 사람도 있었고, 나는 지인 2명을 초대해 회원들이 오기 전에 화실 그림을 설명해 줬다. 회원전에서 그림을 처음 설명했는데 민화의 역사나 배경은 거의 몰라 걱정이 앞섰다. 의외로 사람들은 민화의 전통성이 궁금하지 않았고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 재료, 기법을 궁금해했다. 아는 범위 안에서 열심히 설명했더니 다들 좋아했다. 민화가 이 시대(현대)에도 잘 어울릴지 몰랐다. 민화의 멋을 알게 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에 덩달아 기분 좋아진다.


비루한 설명에 즐거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지출처 : 호율민화연구소 인스타그램 @minhwa_ryul

 

이전 09화 사심 가득 채운 아트페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