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를 배우면서 굵직한 경험들을 7편 썼다. 7편 안에 징징거림에 버금가는 지질한 이야기만 잔뜩 풀어놓았다. 이번 편은 지질함의 끝판왕일지 모른다. 이번 글로 지질함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해 본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마음은 어떤 것인지. 청소년이나 아이가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길 부모는 희망한다. 어른이 되면 기회도 줄어들지만 배움은 인생을 사는데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어른이기 때문에 배움의 기회가 없는 것인지 두려움이 앞서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누구나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첫 시작에 대한 두려움부터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장벽을 넘어서는 힘듦까지.
내 이야기다. 혼자서 잘 돌아다니고 배우러 잘 다니지만 뭘 배울 때마다 부딪히는 고비가 있다. 어릴 때 그러니까 청소년, 20대 때(?)만 해도 나는 고비에 부딪힐 때 눈물로 감정을 표출했다. 고등학교 때 풍물패에 들어가 북을 배웠다. 둥둥둥 두드리면 될 줄 알았던 북은 장단을 타야 되고 강약을 조절해야 하며 박자를 맞춰야 했다(다른 악기도 그렇지만). 뭐가 잘 안 되었는지 기억도 안 나고 별 것 아니었을 예감이 들지만, 배운 지 일주일 만에 이 악물고 울면서 북을 치고 있는 나. 선배들, 친구가 놀랐다. 방학 2-3주 동안 익혀야 하는 풍물이었고 동아리 마지막 행사에 한바탕 놀 수 있는 공연을 해야 했다. 장단 하나가 익혀지지 않으니 여기까지 내 한계인가 생각했다. 이것밖에 안되는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고 주위에서 놀랐다.
배움의 두려움은 이 기억에서 출발한다. 배우기 전에 심호흡을 한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 없다. 차근차근해야 한다. 급하지 않게 행동하자. 성격 급한 내가 주문처럼 반복하는 문장들이다. 기초가 부족한 내가 민화라고 다를까. 모란, 연꽃을 넘어 바로 책가도로 진입. 기초가 쌓일 틈이 없다. 기본, 기초는 반복이 정답이다. 반복, 연습에 ‘이제, 그만.’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다. 반복 연습하고 싶은 도안을 찾았다. 패턴 모란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이미지를 발견했다. 화실에 도안이 있다. 원본은 모란 나무(?)가 완전체로 있지만 내가 그린 그림은 그중 일부 끝부분이다.
작은 이파리가 많다. 반복되는 그림이라 밑그림은 수월하게 땄다. 시간은 걸리지만. 모란 색칠도 그럭저럭. 문제는 이파리다. 아니 바림이다. 내가 본 사진에 노란 모란이 눈에 띄었고 초록이랑 조화롭다고 생각했는데 내 그림은 상큼한 느낌이 아닌 조잡해 보였다. 60대쯤부터 좋아하는 요란한 꽃무늬도 아니고 단아한 분위기도 아니고 뭐지? 이럴 때 내가 색깔 보는 안목이 없나 심히 고민스럽다. 작은 면적이라 바림을 하면 이파리를 모두 메워버릴까 신경 쓰인다. 그러다 보니 바림을 하기 위해 올린 색에 끝을 당겨 퍼트린다. 끝을 당겨버리니 밑색과 바림의 색 차이가 크다. 신경이 곤두선다. 이게 아닌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짜증이 밀려온다. 입을 닫아버린다. 화를 안고 기계적으로 빨리 끝내버리자는 생각밖에 없다.
이 그림 왜 이래 오래 걸리냐고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께서 그럴 땐 다른 그림으로 기분 전환 하면서 작업하라고 일러주셨다. 이미 2/3을 넘어섰는데. 난 이 그림에 미련이 없는데. 그냥 해치우자는 마음밖에 없다. 꽃들 사이에 나비가 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뽐낼 수 있을 줄 알고 엄마에게 그림을 드리려고 시작했지만, 점점 산으로 가고 있어 엄마에게 줄 마음도 고이 접었다. 될 대로 되라지 뭐, 하는 심정이다. 입 닫고 화난 기운 뽐내며 그리고 있으니 선생님께서도 ‘말 시키기가 겁난다(?) 무섭다(?)’라고 하셨다. 앗! 미안한데. 후훗! 털어버려야 된다. 이 기분에 사로 잡히면 안 된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이순신도 아니지만 내 기분을 타인이 알아차릴 만큼 티 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 하는데 하나 도움 되지 않는다. 혼자 일하는 것도 아니니까. 화는 차 안에 나 혼자 있을 때만 허용된다. 그래서 운전할 때 칼치기 하면서 끼어들거나 깜빡이 안 키고 들어오는 차 보면 중얼중얼 거린다. 욕지거리까지도 안될 혼잣말. 그래도 내 차 블랙박스를 남이 볼까 두렵다(하하).
이파리가 대충 끝나고 나니 기분도 한결 편안해진다. 잎맥을 가늘게 그어야 했는데 굵게 그어진다. 붓이 나랑 안 맞아서 그런 거겠지. 다른 붓으로 바꾸면 된다. 그뿐이다. 나비를 그리고 마무리했다. 작품으로 완성하지 않고 말아서 책장에 꽂아두었다. 어느 글인지 티비에서 봤는지 그림은 액자에 씌울 때 작품으로 완성된다고 했다. 화실에서 처음 그린 모란을 말아서 고이 두었다. 이 그림, 만냥금 그린 그림도 같이 두었다. 작품으로 완성하지 않은 채 둔 그림 몇 점들이다. 아! 연꽃은 다 나눠줬다. 요가 그림도 요가원에 드렸다. 선생님들 모두 가져가실 줄 알았는데 한 분만 가져가셨고 요가원에 전시(?) 중이다. 곧 1년 되어가네.
‘배움의 배신’은 <배움의 배신> 책에서 따온 말이다. 작가는 나처럼 이것저것 배운 에피소드를 썼다. 대금은 주위에 배운 사람 있어서 재미있었지만 특이하지 않았다. 성우는 인정. 한 때 나도 성우나 라디오 디제이 하고 싶은 마음 있었기에 부럽기도 하고. 작가는 다양한 배움의 시작을 썼지만 끝까지 완성한 배움은 없어서 ‘배움의 배신’이라고 했다. 어느 정도 배워야 완성하고 종료할 수 있을까. 오늘도 그림 그리러 화실에 갔다. 성질 급해 생긴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 ‘배움의 배신’으로 끝내지 않길. 내일이면 만 2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