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 테비 Jun 06. 2024

속도의 안내자

24년 6월 6일 읽고 있는 책

<이 별이 마음에 들어, 김하율>을 재미있게 읽었다. 책은 제11회 수림문학상 수상작이다. 수상작들을 읽어보면 지금까지 독서는 무엇인지 모르겠는 지루함이나 전개로 바닥을 기는 속도로 읽었다(특히 노벨문학상). <젊은작가수상 수상작품집>은 그나마 예외로 몇 년 읽었을 뿐 수상작을 애써 찾아 읽지 않는다. 예를 들면, <채식주의자>도 읽지 않았다.

여느 수상작과 다르게 수림문학상은 분위기가 다르다. 한 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역대 수상작 중 장강명 작가도 있음을 보고 짱짱한 사건 중심 소설이 아닐까 판단했다. ‘수림문학상 수상작’ 읽기 모임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이래서다. 5월 <속도의 안내자>를 시작으로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로메리고 주식회사>, <콜센터>, <나의 골드스타 전화기>, <열광금지 에바로드>, <이 별이 마음에 들어>까지 읽고 12월에 제12회 수상작을 읽는 여정이라는데 조용히 따라갈 예정이다.

<속도의 안내자> 모임에 책을 쓴 ‘이정연 작가’를 비롯해 수림문학상과 관련 있는 여러 작가들도 있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내가 끼어들만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없어 이정연 작가가 던지는 질문이나 진행자가 던지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으려 노력하며 글을 읽고 있다. 지금 몇 장 남지 않아 마저 읽고 싶지만, 오늘이 가기 전에 연재하고 싶어 책 마무리는 내일 하는 것으로 남겨둔다.

얼굴에 바코드나 유전자 암호 코드를 암시하는 분위기

속도의 안내자 표지와 목차가 마음에 든다. 흔한 표지가 아니라 마음에 들고 장편소설인 <속도의 안내자>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소제목 붙은 장편소설은 친절하니까. 이런 목차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1부 2부 같은 장으로 구별되어 있는 책들 읽다가 익숙한 정취가 묻어난다. 소재는 ‘경마장’, ‘젊음(생명연장)’, ‘임상시험’, 등이다. 소재 얘기를 들으면 내용이 유추가 될까. 경마장에서 아르바이트 신분으로 일 하던 채윤에게 선배가 제안한 고액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단순히 배달만 하면 되는 일이었고 절대 불법은 아니라는 말에 미심쩍었지만 유학자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채윤이 배달하는 품목은 알약이다. 알약은 텔로미어라는 유전자(정확히는 TATA box라고 하는 DNA 말단에 있는 부분, 대학 때 배운 기억을 더듬어)를 건드려 생명연장에 관여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실험용 기니피그, 고모는 자신의 가족을 그런 대상으로 제약사에 바쳤다.

살짝 감이 온다.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부류 부유한 사람들. 가진 부를 쉽게 놓고 싶지 않아 죽음이 조금이라도 천천히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 개발된 약이다. 효과가 있는 만큼 부작용이 심해서 승인이 나지 않자 동물실험 없이 비밀리에 임상 실험을 간행한다. 아무리 효과가 좋고 부작용이 없더라도 이 약은 상용화될 수 없다. 약이 오염되면 안 돼서 라텍스 장갑이든 장갑을 끼고 만져야 하며 몸에 닿으면 절대 안 된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하, 하는 탄식이 나온다. 상용화되는 약에 부합되는 가장 기본 조건을 충족하지 않잖아. 소설이니까 설정 가능하다.

이 책이 상을 탈만하다고 느낀 부분은 중심 사건 하나를 전개하는 방식이 하나였다면 다소 진부 했겠지만,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다. 대기업에서 비밀리에 임상 체험으로 약을 개발하고 있는 와중에 이 약을 빼돌리려는 무리, 약의 부작용이나 정당화되지 않은 방법으로 약을 개발하는 실태를 알리려는 무리 모두가 채윤 주변에 일어남으로써 영화를 보는 것처럼 탄탄하다. 반면 영화의 장면처럼 몇 장면이 생략하고 전개된 속도가 나타나기도 한다. 채윤 고모가 채윤이 배달하는 약을 중국에 빼돌려 카피약을 판매하는 사업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책은 불친절하게 한 줄의 내용만으로 설명했기에 나의 이해력을 곱씹으며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비슷하게 영화였다면 한성태 집에 숨어 있는 주인공 채윤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겁을 먹은 장면에서 쓰러진 동작은 생략하고 정신이 드냐는 질문으로 장면이 바뀌면서 이야기가 이어질만한 부분이다.

198-199쪽
현관에서 네 자리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채윤은 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꼼짝하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연이어 잘못 눌러 문이 잠겼다. 한성태일까. 그는 마지막 문장 당분간 서울에 못 올라간다며 연락을 부탁한다고 안부를 남겼다. 그가 아니라면 승원에서 사람을 보냈나? 혹시 배달자? 기어이 들통났다는 생각에 머리가 쭈뼛 서면서 가슴이 꽉 막혔다. 숨을 데라곤 없는 공간이었다. 뛰어내릴 수도 없는 높이였다. 문이 열리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끌려가거나 고개를 수그린 채 지시를 따르는 것뿐일 테다. 채윤은 문을 밀고 들어오는 사람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엎어져 얼굴을 감췄다.

“정신이 나요? 항, 어쩌다 이렇게…..”
한성태는 채윤의 어깨를 붙들며 생수병을 내밀었다.

쓰러진 걸까? 하며 다시 읽었다. 쓰러졌다는 말이 없었는데. ‘엎어져 얼굴을 감췄다’가 쓰러짐을 묘사했구나. 한 줄 띄어쓰기로 화면 전환 시키는 효과를 낸다고 느끼며 계속 읽어 내려갔다.


생명연장에 직접 관여하는 약이 상용화된다면.

156쪽
가까이 마주한 여자는 분위기가 어딘지 원숙해 채윤보다 나이가 들었을 거라고 짐작되지만 연령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눈높이가 높아 키는 175센티미터가 넘을 거고, 군살 없이 바른 체형이라 모델이나 무용수 같은, 몸을 아름답게 쓰는 직업을 가졌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156쪽 문장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외모를 가지게 된다. 청소년들과 읽은 <아이를 빌려드립니다, 알렉스 쉬어러, 2019년>도 생명 연장이 소재다. 생명을 연장하는 약을 국가에서 나눠준다. 아이를 낳지 않으니 노동력이 소중해 죽지 않고 사는데 도움을 주는 약을 인구를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가는 이용한다. 50대쯤 보이는 사람이 100살이 훌쩍 넘은 나이다. 약을 먹은 시점부터 노화는 멈춘다. 어쩌다가 아기가 태어난다면 숨어 산다. 아기가 유괴될 위험에 처하니까. 유괴된 아기는 아기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약을 먹여 서커스에 이용하거나, 아기를 만지고 싶거나 돌보고 싶어 하는 가정에 아이를 빌려주는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생명 연장이 놓을 수 없는 것들을 유지할 수 있는 완벽한 장치로 보이지만, 먼 미래에 도달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나는 자연 노화를 받아들이겠다.

이전 18화 마녀들, 브랜다 로사노 장편소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