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변에 머무는 삶을 좋아한다.
핵심에 다가가기보단, 그 주변에서 관찰자가 되기를 택한다.
특히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가장 그렇다.
복음을 듣는 자로 살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지 않는다.
주변에 머물다 보면 주변에 머무는 스스로를 안주하고 방어기제가 생기므로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는 변명거리가 늘어난다.
'아직은 아니야.'
'조금 내 상황이 나아지면.'
'다음 기회에...'
주변에 있으면 신성은 주변으로 퍼져 버리고 주변이 모인 인성의 에너지로 휩싸인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는 다양한 핑곗거리에 맴돈다.
인간적이고 다소 실망스러운 목사, 혹은 사람 이야기에 더 염증을 느껴하며
주변에서 맴도는 것의 확고한 성을 구축하게 된다.
심지어 종교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겉모습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내가 주변에서 머무는 사람인지,
혹은
정말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
복음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가 되었는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예수님을 자랑스럽게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지
난 항상 주변에 머무는 삶만 살았다.
성경을 완독 하고, 줄을 그어가며 읽고,
좋은 구절을 암송하고, 설교를 들었지만
제자리걸음이었다.
그 제자리걸음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양육'의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성장하는 과정을 선택할 때,
스스로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알기를 소원할 때
양육을 시작하게 되고,
그 과정 속에 자연스레 주변에서 중심으로 나의 모든 것이 옮겨지게 된다.
그 양육의 첫걸음이 나에게는 큐티였다.
기도를 하고, 말씀 속에서 묵상을 하고, 결단을 하고, 다시 기도를 드리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루를 시작하는 과정 속에서
그렇게 주변인에서 중심으로 삶을 전환하게 되었다.
주변인에서 중심인으로 변화하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하나님의 뜻대로 중심을 잡고 사는 삶은 내 삶이 곧 하나님의 쓰임으로 쓰이는 삶이었다.
내가 잘되도 하나님의 복이요, 내가 안되더라도 하나님의 가르침이니
슬프고 두려웠던 삶에서
기쁨과 충만함으로 변화해 나갔다.
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큐티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추운 겨울 아가들이 번갈아가면서 아픈 과정 속에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던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