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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로미의 김정훈 Mar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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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산

캐서린 블라이 콕스라는 내 친구는 첫딸이 태어난 뒤 나에게 말했다. 

"나는 진화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내 딸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녀가 했던 이 말, 그녀의 통찰이 나는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한층 더 깊은 저 아래 어떤 층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물질적인 즐거움으로 내모는 것들이 있고 유전자를 후대에게 전하도록 내모는 진화의 힘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경제학과 정치학, 진화심리학이 관장하는 인생의 층들이다. 그러나 이 층들은 샤르트르대성당이나 <환희의 송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 감옥에 갇힌 넬슨 만델라, 전쟁 상황실에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 우리가 사랑의 격렬함과 충만함을 느낄 때 이 심리적 정서적 상태를 설명하지 못한다. - <두 번째 산>, 데이비드 브룩스 中



저에겐 정말 중요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20살에 대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1년 반동안 행복이라 믿고 누려온 술자리의 쾌락, 유튜브의 마력,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은 진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지만 무엇이 행복인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최소한 그런 게 '행복이 아니다'라는 사실만 알았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목표를 이뤘을 때의 행복이 바로 그런 '가짜 행복'인 거 같습니다. 목표를 이루면 잠깐동안은 행복하지만 진정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깊은 우울증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자아만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대학이라는 목표를 이루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대학생들은 보통 '의미 있는 일'을 찾곤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삶이 의미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노력해서 대학교에 왔는데 왜 삶이 의미가 없지? 그럼 나를 진정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삶, 노력할 일은 어디 있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들은 에고가 하찮은 만족을 느낀 것을 압니다. 더 쉽게 말해볼까요? 이전에 '나'라고 믿었던 게 '나'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더 높은 행복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이 아직 에고의 조종에서 벗어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자주 에고에 굴복합니다. 아직 에고에 대해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표가 잘못됐나? 내가 계획력이 부족했나? 내가 운이 안 좋았나? 내 능력이 부족한가?'라고 생각하며 다시금 에고에게 조종당합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말합니다. "첫 번째 산이 자아를 세우고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자아를 버리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는 두 번째 산에 올라가기 전 절망의 골짜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내가 무언가를 다시 규정하고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만족하리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산은 생각보다 너무나 단순합니다. 첫 번째 산보다 훨씬 말이죠. 바로 자기를 내려놓으면 됩니다. 



놓아 버리고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도록 하면 됩니다. 다른 말로 자아를 놓아버리면 됩니다. 나를 놓아버릴 때 우리는 두 번째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야만 진정한 만족감을 얻으리라고 믿지만, 사실은 반대로 놓아버릴 때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저는 자아를 쉽게 내려 놓지 못했습니다. 욕심과 기대, 두려움과 자기연민이라는 자아의 만족감에 취해 절망의 골짜기에서 오래동안 추락해야 했습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아라는 무거운 껍데기를 벗기면 자연스럽게 날아오릅니다. 



두 번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삶에게 자신을 내맡깁니다. 모든 상황이 완벽하다는 사실을 알고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도록 놓아버립니다.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것, 일, 사람, 철학과 신앙, 공동체에 헌신합니다. 그것이 바로 데이비드 브룩스가 말하는 '자아를 놓아버리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요즘 이런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굳이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을 필요가 없는 거 같아. 내 인생 즐기기도 바쁜데, 오히려 나만 피곤해져.' 맞습니다. 내가 피곤해지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람들이 말하는 '나'는 진정한 '나'일까요? 여기서 사람들이 말하는 '나'는 에고입니다. 언제나 피곤함을 느끼는 건 에고입니다. 에고를 꽉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에고를 내려놓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해? 너무 피곤하잖아. 헌신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피곤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피곤하다는 생각은 누가 할까요? 당연히 에고입니다. 



두 번째 산에 있는 사람들은 c. s. 루이스가 표현했듯이 "내 이웃이 누리는 영광의 무거운 짐을 날마다 내 등에 지우고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이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오로지 겸손함만이 그 무게를 버틸 수 있다. 혹시라도 자존심을 내세우다간 그 짐의 무게로 등이 부러지고 말 것이다."  - <두 번째 산> 中



혹자는 말합니다. "저는 무엇에 헌신해야 할지 알게 되면 그때 자아를 내려놓겠습니다." 이건 당연하게도 순서가 잘못된 말입니다. 자아를 내려놓으면 그때 무엇에 헌신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물론 혹자는 과거의 저였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런데 의미 있는 삶, 진정한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싶다면 일단 자아를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게 두 번째 산을 오르는 법을 배우는 길,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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