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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로미의 김정훈 Mar 20. 2024

스콧 애덤스를 좋아하세요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내 안에 잠든 잠재력과 행복을 모두 발산하는 법을 알려드리려 합니다. 심지어 방법도 단순합니다. 준비물은 하나, 글을 읽을 충분한 시간입니다. 



공명하다. 사람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은 각자 고유의 진동수를 가집니다. 그리고 한 물체가 다른 물체와 진동수가 일치할 때 우리는 공명합니다. 


말이 어렵나요? 이해할 필요 없습니다. 우린 모두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아주 조금만 대화를 나눴는데도 죽이 척척 맞고 '나랑 잘 맞는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책을 읽다가 갑자기 어떤 문장이 크게 와닿은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것이 바로 공명의 순간입니다. 



지금껏 저와 공명한 수많은 사람과 책, 문장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저를 흥분하게 만든 문장들. 공명을 넘어 무한한 행복을 준 문장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거야!' 뭐 이런 생각이 바로 드는 문장들. 다 느낌 아시죠? 스콧 애덤스입니다. 




(…) ‘그런 척’이라도 계속하다 보면 진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저는 지독한 낙관주의자입니다.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뭐랄까,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죠. '잘 될 거야.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하면서 대단한 계획은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5년 뒤 미래는 장밋빛으로 그려놓지만 막상 그런 미래가 뭔지도,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뭐 그런. 다들 아시잖아요. 


그런데 저는 제가 낙관주의자로서 자격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냐고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냐고요? 아닙니다. 그런 건 좀 뻔하잖아요. 제가 자격이 부족한 이유는 '~거야'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진짜 돌아버린 낙관주의자들은 이미 그런 척을 해버립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진짜 그렇게 됩니다. 


스콧 애덤스는 블로그에 자신의 만화를 올려왔습니다. 그리고 유나이티드 미디어가 그의 만화를 연재하겠다고 제안했죠.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유나이티드 미디어가 <딜버트>를 신문 잡지 연맹을 통해 연재하겠다고 제안한 지 일주일 만에 내 그림 실력이 극적으로 향상되었다. 이제 나도 공식적으로 직업 만화가의 대열에 올라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면의 잠금장치가 해제되며 갇혀있던 재능이 분출되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 ‘그런 척’이라도 계속하다 보면 진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더 시스템> 中


일주일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유나이티드 미디어가 그림 실력 향상 코스를 열었나요? 아닙니다. 실제로 연재가 시작되었나요? 아니요. 제안 말고 한 게 없습니다. 유일한 변화는 하나, 스콧 애덤스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갇혀있던 재능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비법은 뭘까요? 자신이 직업 만화가의 대열에 올라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 그런 건 옳지 않습니다. 이미 그런 사람입니다. 그럼 진짜 그렇게 됩니다. 이미 그런 사람이라고 믿는 순간 내 잠재력이 닫혀 있는 문의 스위치가 on으로 바뀝니다. 


'나중에 일이 생기면 진짜 열심히 할 거야? 나중에 성공하면 진짜 행복하게 살고 남들한테 다 베풀고 살 거야?'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진짜 고수는 이미 그런 것처럼 살기 시작하고 행복과 성공을 느끼며 삽니다. 


이건 사실 저에게 하는 말입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 그냥 언젠가 이 글이 누군가에게 읽혀서 좋은 영감을 줄 거라 믿어야지..' 하면서 쓰니까요. 이건 뭐, 각이 안 잡힙니다. 글도 어영부영이고, 문장 하나하나에 인생을 걸지도 않습니다. 


“성공하고 나면 쥐새끼처럼 살지 않겠어.” 천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성공한 것처럼 살기 시작하고 지금 성공을 느끼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종종 ‘힘이 생기면 매일 아침마다 조깅을 할 거야'라고 말한다. 천만에! 먼저 시작하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숙제를 하겠어.’ 그게 아니다. ‘힘이 생기면, 작은 사업을 시작하겠어.’ 그게 아니라니까. - <마음 가는 대로 해라> 中


그게 아니라지 않습니까 ㅎㅎ. 이게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자세"가 달라진다', '더 열심히 살게 되어서 성공하는 데 동기부여가 된다', 뭐 이 정도 선에서 효과를 보고 끝낼 문제가 아닙니다. 이 안에 내 모든 잠재력과 에너지를 열어젖힐 수 있는 심오한 비법이 숨어 있어요. 아직 감을 못잡겠다고요? 


예를 들어볼게요. 여기 A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A는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맡겨진 업무를 모두 넘긴 후에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사가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A 씨, 내일 나 좀 봐요.’ 


갑자기 오만생각이 다 들기 시작합니다. 이 상사는 업무에 대해 악랄하게 피드백하기로 악명 높은 사람입니다. 퇴근을 해서 집에 갔지만 하나도 편하지 않습니다. 밥도 넘어가지 않죠. 잠도 잘 오지 않습니다. 집 안에 있는 모든 공기와 중력이 모두 내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입니다. 내일 대체 무슨 말을 들을지 너무 걱정됩니다. 차라리 지금 당장 욕을 얻어 맞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상사에게 갔더니, 수고했다고 말하며 다음 업무를 줬습니다. 그게 끝이었습니다! 갑자기 A는 속에서 확 하고 열리는 기분이 들면서 가볍고 편안해집니다. 점심이 너무 맛있게 느껴지고 막혀 있던 에너지가 모조리 쏟아지는 기분입니다. 


대체 무엇이 변한 걸까요? 이 가벼운 느낌은 뭘까요? 전날에 날 쥐어짠 그 느낌은 다 뭘까요? 정말 말 한마디에, 단 1초 만에 행불행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아까까지 없던 에너지가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차오르는 걸까요? 대체 어디서 이런 변화가 있었을까요? 비법은 뭘까요? 바깥에 있는 걸까요? 


모두 내면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무한한 에너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면 에너지에 대한 지배권을 항상 외부에 넘겨왔습니다. 누군가 칭찬을 해줘야 신이 나서 일하고, 누군가 비난을 하는 순간 에너지를 닫아버립니다. 결과가 좋으면 신나서 일을 하고, 결과가 나쁘면 침울해서 밥도 먹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어렸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우린 언제나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누가 그 에너지를 닫았나요? 어떤 사건들이 닫았습니다. 과거의 어떤 특정 경험은 우리가 그 경험을 다시 하지 못하도록 에너지를 닫아버립니다. 왜냐하면 아팠기 때문이고, 감정을 억눌렀기 때문입니다. 점점 에너지 닫는 게 습관이 되고, 여는 법을 잊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내면의 힘을, 내면의 에너지를 우리 스스로 열고 닫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닫아 놓기 때문입니다. 모두 우리가 그렇게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절대 외부의 일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에너지의 지배권이 바깥에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길게 얘기했을까요? 행복, 무한한 재능과 잠재력, 에너지, 절대 지치지 않는 체력과 행복. 그 스위치가 모두 우리 내면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목표만 이루면 진짜 행복할 거야.' 이거 아니라잖습니까. 지금 스위치만 열면 행복해집니다. 


이번엔 실제 사례로 가보겠습니다.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가진 거 하나 없었죠.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학생에게 오더니 손금을 스윽 봅니다. 그러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진규는 언젠가 크게 될 사람이에요. 내가 장담합니다!" 


손금? 과학적 근거 없습니다. 그냥 듣기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 등불이 나로 하여금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믿게 된 것이다. 시련과 고통이 내 앞을 가로막을 때마다, 나는 큰 일을 할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부추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을 믿는 힘, 그것은 종교의 힘 못지않게 큰 것이다. -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中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의 저자가 됩니다. 그녀는 내면의 에너지가 닫히려 할 때마다, 세상이 나를 포기하게 만드려 할 때마다 나는 큰 일을 할 사람이라고 되새기며 닫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런 척하는 것. 이미 그런 사람이 됐다고 믿는 것.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는 것. 그것은 종교의 힘 못지않게 큽니다. 종교의 힘이 얼마나 크냐고요? 나라를 만듭니다. 목숨을 다 바칩니다. 종교에 인생을 거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게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에너지를, 내면의 힘, 무한한 잠재력을 발산하는 것은 모두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영적인 방법은 뭘까요? 스위치 자체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어려운 경지입니다. 쉬운 방법은 뭘까요? 스위치를 열어보는 겁니다. 어떻게 여냐고요? 돌아버리는 겁니다. 나에게 그런 힘이 있다고, 난 이미 내가 원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거죠. 저는 지금 에너지를 항상 열어둘 수 있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를 제시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돌아버리세요.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미 얻었다고 믿으세요. 진짜 그렇게 됩니다. 


깊고 일관된 마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중하는 자세만이 필요하다. 나는 긍정 선언은 당신이 집중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고, 당신의 낙관주의와 에너지를 북돋우며, 어쩌면 당신이 무의식적으로나마 인지하고 있었던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도록 돕는 시스템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 <더 시스템> 中




지독한 낙관주의자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스콧 애덤스는 어느 순간부터 말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상 대화에서는 거의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경련성 발성장애 진단을 받습니다. 그리고...



“치료법이 뭔가요?” 내가 조용히 물었다. 

“없습니다.” 전문의가 대답했다. 

하지만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내 안의 낙관론자가 전문가의 우울한 대답을 이렇게 해석해서 들려주고 있었다. “스콧, 너는 세계 최초로 경련성 발성장애를 고치는 사람이 될 거야.”

(…) 나는 가끔 이렇게 끝장을 보고야 만다. 

이런 정신은 놀라울 정도로 유용하다. 



정말 속에서 거대한 웃음이 퍼졌습니다. '그래, 이거지!' 하는 그 느낌. 완전한 행복, 공명하는 느낌! 이렇게 낙관적인 마인드, 끝장을 보는 마인드는 항상 제 가슴과 공명합니다. 저는 끝장을 보는 사람들을 동경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들, One of them이 항상 되고 싶습니다. 아, 아니죠.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끝장을 보는 사람입니다. 


끝장을 본다는 게 뭘까요? 


나는 무슨 일이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평생을 언제나 그 시절 자전거 쌀 배달꾼 연습 때처럼 최선의 노력을 쏟아부으며 살아왔다. ‘요만큼’이나 ‘이만큼’이나 ‘요정도’, ‘이 정도’는 내게 있을 수 없었다. - <이 땅에 태어나서> 中
더 하려야 더 할 게 없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하는 최선. 이것이 내 인생을 엮어온 나의 기본이다.
- 정주영


스콧 애덤스는 더 하려야 더 할 게 없는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결국 경련성 발성장애를 극복합니다. 



문득 '끝장을 보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뭉친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싶어 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 어떤 문장, 어떤 책과 공명하시나요? 


여러분은 그리고 있는 미래가 있으신지요? 미래를 살지 마세요. 지금, 바로 지금 그런 척하세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행복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러니 여러분이 '나는 ~~ 만 해결되면 행복할 거야'라고 말하는 그 조건을 이미 얻은 척하세요. 왜냐고요? 우리는 이미 우리가 얻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얻고자 하는 바를 이미 얻었다는 사실뿐이다.” - 아니타 무르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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