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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로미의 김정훈 Mar 15. 2024

이반 일리치를 좋아하세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오늘 밤 네가 죽는다면 오늘 하려고 했던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삶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나가떨어지고 정말로 중요한 것만 남습니다. 



죽음을 명상하면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게 중요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합니다. 목표보다는 목표를 통해 얻고자 하는 느낌이 중요합니다. 생각보다 무념이 중요합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보다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자아를 드세우는 것보다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한 번의 삶에서 여러 번 죽음을 맞습니다. 여러분은 몇 번째 삶을 살고 계신가요? 아마도 첫 번째는 아닐 겁니다. 저는 아마도 20살 즈음에 한번, 22살 즈음에 다시 한번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저와 함께 죽음에 대해 명상해 보시는 건 어떤가요? 비록 저와 같은 정신적 죽음은 아니지만 그 표현이 참으로 맛이 좋아 우리의 명상에 많은 도움을 줄 사람이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발을 내려놓고 한 팔을 베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불쌍했다. 게라심이 옆방으로 가자마자 더는 참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지독한 외로움, 사람들의 냉혹함과 하나님의 무자비함, 그리고 하나님의 부재가 서러워서 한참을 울었다.

‘대체 제게 왜 이러는 겁니까? 왜 저를 이렇게까지 만든 겁니까? 왜, 대체 왜 저를 이렇게 끔찍이도 괴롭히는 겁니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저 울기만 했다. 대답은 없을 것이며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 통증이 심해졌지만 몸을 뒤척이지도 않고 누구를 부르지도 않았다.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그래요! 나를 치세요! 그런데 도대체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겁니까?’ 


그러고 나서 그는 조용해졌다. 울음을 멈추고 숨 쉬는 것까지 멈추고는 온 정신을 집중했다. 사람이 내는 목소리가 아닌 영혼의 목소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그가 처음으로 들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분명한 개념은 바로 이 질문이었다.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이반 일리치는 이 말을 되풀이했다. “무엇이 필요하냐고?”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고통받지 않는 것. 그리고 사는 것.”

다시 온 정신을 집중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그 순간만큼은 고통도 잊을 정도였다.

“사는 거라고? 어떻게 말이냐?” 영혼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래요, 사는 것 말입니다. 예전처럼 사는 것.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것.”

“예전에 네가 어떻게 살았지? 건강하고 즐겁게 살았던가?” 영혼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는 예전 즐거웠던 삶의 순간들을 기억 속에 떠올려보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전 즐거웠던 그 모든 순간이 이제 와서는 그때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 말고는 모두 그랬다. 어린 시절 그때는,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그것에 매달려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정말로 행복한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복을 느꼈던 사람은 이제 없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추억인 것만 같았다.

기억이 현재의 그, 현재의 이반 일리치가 존재하는 순간에 이르자, 그 시절에는 기쁨으로 여겼던 모든 것이 눈앞에서 녹아버리면서 보잘것없고 종종 추악하기까지 한 뭔가로 변해버렸다.



21살에 군대에 가자마자 예전 즐거웠던 삶의 순간들을 떠올려봤습니다. 그랬더니 제 삶이 마치 제삼자의 삶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말하듯 '누군가 다른 사람의 추억인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김정훈이 즐거웠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니, "그 시절에는 기쁨으로 여겼던 모든 것이 눈앞에서 녹아버리면서 보잘것없고 종종 추악하기까지 한 뭔가로" 변해버렸습니다.



이반 일리치,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름 좋은 지위에 안정적인 결혼 생활까지.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안정'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그는 죽을병에 걸리고 맙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행복이라 믿어온 것들이 어쩌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 깨달음은 새로운 인생으로 가기 전 정신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다 하면서 살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가 바로 다음 순간 삶과 죽음의 모든 수수께끼를 풀 단 하나의 해답을 마치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인 양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지금 네가 원하는 건 대체 뭐지? 사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인가? 교도관이 ‘재판이 시작됩니다!’라고 외치는 법정에서의 삶이 네가 원하는 삶인가?’ 재판이 시작된다, 재판이 시작된다, 이반 일리치는 이 말을 입 속으로 되뇌어보았다. ‘그래, 재판이 시작되었어! 그리고 난 아무 죄가 없어!’ 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반 일리치는 울음을 그쳤다.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하고 또 했다. 이유가 무엇인지, 왜 이런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하는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종종 그랬듯, 이 모든 것이 그가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서둘러 자신이 늘 올바르게 살았음을 떠올리며 이 이상한 생각을 떨어냈다. 



처음엔 부정합니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내가 이렇게 불행한 이유는 사회 때문이고, 병 때문이고, 사람들 때문이야.' 나는 분명 그 당시에 최선이라 생각한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처럼 비참한 불행이라니. 그러다 문득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나의 탓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자신이 얼마나 자기만의 올바른 원칙에 따라 살았는지를 떠올리며 생각을 잊곤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계속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의 정신적 고통은 그날 밤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게라심의 광대뼈가 두드러진 선량한 얼굴을 보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오르면서 시작되었다.

내 삶 전체가, 의식적인 내 삶이 정말로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하지?’

예전 같으면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을 절대 할 수 없었겠지만, 이제는 그게 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에 맞서 싸우고 싶다는 충동, 마음속에 어렴풋이 떠오를라치면 서둘러 떨어내버렸던 그 충동, 그것만이 진짜고 나머지는 모두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일, 삶의 방식, 가족, 사교계와 직장의 모든 이해관계가 다 거짓일 수도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 모든 것들을 변호하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이 변호하려 하는 것이 너무도 헛되다는 느낌이 들었다. 변호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서 우리는 나에게 진짜 행복이란 무엇이고, 행복이라는 포장지로 싸놓은 허상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습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이 길의 끝에 허무함이 있으리라는 직감을 어렴풋이 경험합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 나중엔 뭘 하지? 그 후의 계획은 불확실해도 행복하리라는 기대 하나만은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목표를 이루고 나면 내가 목표에 필요 이상으로 기대와 환상을 심어놓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다음에 계획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죠. 우리는 이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행불행은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하지만 아직 이것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더 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목표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여전히 행복이 바깥에 있다고 믿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곧바로 깨닫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은 '나'가 아니다. 하지만 이건 모릅니다. 지금까지의 '나'가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이반 일리치도 같은 의문을 품습니다. 계속 가보겠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생각했다. ‘만일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다 망쳐놓았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도 바로잡을 기회조차 없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는 똑바로 누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아침에 처음 시종을 보았을 때, 이어서 아내와 딸과 의사를 보았을 때, 그들이 했던 행동 하나하나, 그들이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날 밤 모습을 드러낸 처참한 진실을 그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이반 일리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삶과 죽음을 가려버리는 무섭고도 거대한 기만이었음을 똑똑히 보았다.

(...) 

갑자기 어떤 힘이 그의 가슴과 옆구리를 때리는가 싶더니 숨 쉬기가 더 힘들어졌다. 그는 구멍 속으로 떨어졌다. 그곳에, 그 구멍 끝에 뭔가가 환한 빛을 내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갈 때 사실은 앞으로 가고 있는데 뒤로 간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제대로 된 방향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이반 일리치에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래, 모든 것이 잘못되었던 거야. 하지만 상관없어. 올바른 것을 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올바른 것’이   대체 뭐지?”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나서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내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서 올바른 게 뭔지는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동안은 우리가 가진 최고의 축복이라 불리는 '이성'으로 올바른 것을 만들어왔습니다. "사회가 그렇다잖아. 이렇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잖아." 머리로 올바른 게 뭔지 생각해 왔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거야? 쉽잖아. 남들 다 하는 걸 하란 말이야." 머리로 올바른 게 뭔지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 순간, 머리로 생각한 올바른 것들이 내가 아닌 내 껍데기만을 행복하게 했음을 안 순간 이반 일리치처럼 올바른 것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올바른 것'이 뭘까요. 정말 그게 뭘까요. 그것이 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최소한 머리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영역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때부턴 머리가 아닌 가슴, 이성이 아닌 직관에 의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머리를 사용해서, 이성적으로 접근해서 행복과 올바른 것을 찾으려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직감적으로 했듯이, 우리는 직감적으로 올바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생각을 놓아주어야 합니다. 내 안에 '나'가 아닌 이 녀석을 놓아주어야 합니다. 이반 일리치는 그것을 바로 사용합니다. 바로 침묵과 귀 기울이기입니다.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떨어지면서 한 줄기 빛을 보았다. 그리고 비록 자신의 삶이 완전하지 못했다 해도 아직은 바로잡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올바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침묵하며 귀를 기울였다. 바로 그때 누군가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뜨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아내가 그의 곁에 다가왔다. 그는 아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내는 입을 벌린 채 코와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미처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이반 일리치는 아내도 안쓰러웠다.

그래, 내가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들 안됐어. 하지만 내가 죽고 나면 훨씬 괜찮아질 거야.’ 그는 이 말을 소리 내어 하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아니, 꼭 말로 할 필요는 없어.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는 거야.’ 그는 아내에게 눈짓으로 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데리고 나가줘······ 아이가 불쌍해······ 당신도 불쌍하고······.” 그리고 ‘용서해줘’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엉뚱하게도 ‘용감해줘’라고 말해버렸다. 하지만 고쳐 말할 힘이 없었으므로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을 거라고 믿고 손을 휘휘 저었다.

그때 갑자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면서 떠나지 않으려 하던 것이 두 방향에서, 열 방향에서, 온갖 방향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식구들이 안쓰러웠고, 그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이 모든 고통에서 가족을 구해내고 자신도 벗어나야 했다.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근사하고 또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통증은 어떻게 된 거지? 어디로 간 거지? 이것 봐, 통증,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반 일리치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아, 여기 있구나. 뭐 어때, 거기 있으라고 하지 뭐.’

‘그런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 있지?’

이제는 습관처럼 익숙해져버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죽음은 어디 있는 거야? 대체 죽음이 뭐지? 죽음이 없었으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도 전혀 없었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갑자기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기쁠 수가!”

이 모든 일은 한순간에 일어났으며, 이 한순간의 의미는 이제 변하지 않았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반 일리치의 고통이 그러고도 두 시간이나 더 계속되었다. 그의 가슴에서 뭔가가 끓어올랐다. 쇠약해진 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부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가슴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숨을 쌕쌕 몰아쉬는 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다 끝났습니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반 일리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이반 일리치는 숨을 훅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더니 몸을 축 늘어뜨리며 숨을 거두었다. 



이반 일리치는 죽기 직전 두려움을 초월합니다. 통증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며 통증마저 초월합니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줍니다. 비록 그것을 온전히 표현하진 못했지만 말이죠. 겉으로 표현하지 못했어도 괜찮습니다. 그의 생각과 태도의 변경은 행동보다도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족에 대한 태도,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며 가장 높은 수준의 삶의 의미를 성취합니다. 비록 껍데기의 삶, 이성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삶의 의미는 가장 낮은 수준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삶의 의미입니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프랭클 지음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 세 가지 방식 중에서 세 번째, 어떤 태도를 취하기를 결정하는 방식이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에겐 어떤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마지막에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결정하였습니다. 



죽음과 삶 사이에 공간이 있습니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진실은 반대에 있습니다. 죽음을 더 죽여야 합니다. 죽음에서 아직 미처 죽지 않은 것들까지 모조리 끝내야 합니다. 과거의 모든 미련과 믿음, 습관과 감정을 모두 죽여야 새로운 삶이 태어납니다. 



전환기를 연구한 윌리엄 브리지스는 전환기에 대해 연구하고 터닝포인트를 겪는 사람들을 도우며 한 가지 패턴을 발견합니다. 전환기를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끝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터닝포인트는 <종결 -> 중립 지대 -> 시작>의 단계를 거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바로 시작부터 하려고 합니다. 이미 자신은 죽을 만큼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우린 굳이 머리를 사용하면서, 의지력을 사용하면서 시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삶을 내맡기고 아직 죽지 못한 것을 다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새 삶이 돋아납니다. 



자신이 중립 지대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이전 삶의 문은 닫혔는데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리지 않아 중간에서 막혀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시작에만 몰두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다시 과거로 가서 죽지 않은 것을 더 죽여보세요. 그러기 위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귀를 기울여 보세요.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답이 이미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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