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고3짜리 딸이 있다.
초등학교 때 성조숙증을 앓았기 때문에
나처럼 나중에 유방암이 걸리지 않을까
늘 걱정되는 아이다.
'혹시라도 얘가 유방암에 걸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고
맨날 마라탕만 먹지 말고 밥을 좀 먹으라고
불닭면만 먹지 말고 샐러드를 좀 먹으라고
찬 음료수만 마시지 말고 물을 마시라고
올빼미처럼 살지 말고 일찍 자라고
어째라 저째라
잔소리를 해대지만
사실 효과가 전혀 없다.
효과 없는 줄 알면서도
나의 걱정과 근심, 잔소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3수험생이라 안 그래도 힘들다며
건강 따위는 개나 줘버려 마인드로
개기고 있다.
반면,
유방암 걸린 딸을 둔 우리 엄마는
2018년도에 내가 처음 유방암에 걸렸을 때
머위즙이 유방암 환자에게 좋다며
다짜고짜 머위즙 100개를 보내주신 후로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며칠 전에
"OO아, 수술한 지 5년이 지났으니 이제 다 나았겠지?' 하고
문자로 뜬금없이 안부를 물으셨다.
뭐라 써야 할지 저녁때까지 답을 못 드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암이 재발해서 5월 29일에 수술을 했고
지금은 매일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중이라고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다.
숫자 1이 없어진 뒤에도 아무런 답장이 없었고
다음날이 돼서야 엄마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간밤에 한숨도 못 잤다며 몇번이나 강조한 후
왜 재발이 된 건지 의아해하셨다.
그러게요.
저도 궁금하네요.
왜 재발한 건지.
엄마에게 나는 어떤 딸인지 궁금하다.
2018년, 뇌수술 이후에
시각장애인이 되어버린 남동생 때문에,
경도인지장애를 앓고 계시는 아빠 때문에,
창원에서 서울까지 오기엔 너무 멀어서,
무릎이 시원찮아서,
딸 집에 올 엄두가 나지 않을 이유가
백가지도 넘는 엄마는
단순히 내가 보고 싶어서,
큰딸이 걱정되어서 서울에 오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다른 엄마들은
자기 딸이 암에 걸리면
어떻게 해주시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그저 전화로 안부나 묻고
건강 잘 지키라는 말 몇 마디로 끝내는지 궁금하다.
내가 친정엄마에게
암수술을 숨겼다고 말하면
지인들이나 친구들은
내가 속 깊은 딸이어서 그런 줄로만 안다.
사실은,
말해서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더 크다.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도
위로를 받지도 못할 바에야
얘기 안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쩌면,
암에 걸렸다고
혼날 것만 같아서 숨겼을 수도 있겠다.
어렸을 적 무서운 엄마밑에서
순종적이고 모범적인 딸로 자라
격하게 반항해 본 적도
내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해 본 적도 없다.
혼날 짓은 만드는 게 아니야.
나만 잘하면 돼.
공부 잘하고
예의 바르고
할 일을 알아서 척척 해내는
K장녀.
그게 나야.
속내를 잘 밝히지 않으며
웬만하면 참고 넘어가고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최선의 삶이라 여겼던 그 K장녀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엄마의 무시무시한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왔으며
더 무시무시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감행했으며
더더 무시무시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원을 다녔으며
끝끝내
무얼 하든 인정받지 못하던 그 K장녀에게서
마침내 자지러질 듯 흔들어 재끼는
압력밥솥의 추처럼
40년 동안 꾸역꾸역 쌓여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온 거 같다.
암이라는 형태로.
만약,
내 딸이 유방암에 걸린다면
'내 그럴 줄 알았다!'며 호통을 치게 될까,
아니면 드라마에 나올 법한
지극한 모성애를 가진 K어머니가 될까.
나도 모르겠다.
다만,
딸이 어디에 있든
한달음에 달려가
따뜻한 밥 한 끼 내 손으로 차려주며
먹고 힘내라고
이겨낼 수 있다고
응원해 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