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u's Story #13
환영합니다, Rolling Ress의 카루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도움을 받고, 많은 도움을 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도움을 주고받게 되는 동기는 모두 다를 겁니다. 내가 진정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주는 걸까요? 아니면 그를 도와줬을 때,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기 때문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지금 그를 도와주면 그도 언젠가 나를 도와주리라 하는 생각에서인가요?
정답은 없습니다. 결론만 놓고 보자면 일단 내가 그에게 도움을 준 건 맞으니까요. 내가 정말 선의를 베풀어 그를 도와주든, 아니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를 도와주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본인 속마음은 본인만 알 테니까요.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일이죠.
그래서, 오늘은 이걸 자기 자신의 세계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사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보다 제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신경을 더 많이 쓰는 편이긴 해요. 그게 편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나와 내 안을 관찰하다 보면, 재미있는 사실들이 상당히 많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보상심리(Compensation)라는 말을 아시나요? 실제 심리학에서 쓰이는 용어는 아니지만, 지금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설명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 될 것 같네요.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는 꼭 필요합니다. 다른 부작용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거든요. 그러나, 이 역시도 나를 파멸에 이끌리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파멸이란 말을 지금까지 세 번 했습니다. 한 번 볼까요?
-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기도 하고, 파멸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지난 글에서도 살짝 언급했는데, 벡터가 다른 사람을 무리하게 끌고 나가다 보면 자기가 사라져요. (KS 22, 두근거리는 어색함)
- Pursuing perfection leads to happiness? No. Absolutely not. I'm confident that perfectionism is imperfect and therefore it can eventually lead us ruin. (KS 29, Cry till the sadness turns into madness)
- 그리고 이러한 심리는 꼭 필요합니다. 다른 부작용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거든요. 그러나, 이 역시도 나를 파멸에 이끌리게 할 수 있습니다. (KS 30, 퍼준다고 돌려받진 않아요)
파멸이란 말은 굉장히 강한 느낌을 주죠. 나를 잃어버릴 때, 나로서의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될 때 저는 파멸이란 표현을 씁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이에요. 보상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부당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칩시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할 건가요? 아래 선택지를 드리겠습니다.
1. 내가 참는다. 화병이 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2. 맞서 싸운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고통받지 않도록.
3. 나만 당하는 게 억울하니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고통을 겪게 한다.
4. 발악해봐야 바뀌는 건 없으므로 상황을 피한다.
5. 지금은 해결이 불가능하다. 언젠가를 위해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마지막에 폭로한다.
잘못된 보상심리는 사회 전체를 파멸로 이끌고 갈 수 있습니다. 왜냐? 악의 되물림이죠. "난 억울해! 근데 당했어! 그러니까 너도 당해!"라는, 전혀 건전하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신념을 가지고 폭발하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대체 또 누구에게 고통을 안겨주려고. 당신이 그런 일을 겪은 건 부당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남에게 전가시키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마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예시가 좀 극단적이라서 그랬을까요. 그럼, 이렇게 상황을 바꿔봅시다. 방금까지는 부정적 보상심리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이번엔 긍정적 보상심리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학교에서 과제를 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래밍 수업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죠. 앱 개발을 한다고 합니다. 나만 할 수 있고, 다른 친구들은 아예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합시다. 그럼 모두들 아마 내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본인이 나서서 직접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도 있겠죠. 여기서 선택지가 두 개 있습니다.
1. 나는 프로그래밍을 잘하므로 반 친구들 모두를 확인하며 최대한 많은 친구에게 도움을 준다.
2. 내가 도와주고 싶은 딱 한 사람만 잡아서 그 친구에게 최대한 많은 도움을 준다.
대부분의 경우, 1번 선택지를 고르는 게 현명합니다. 현실에서 2번은 걸림돌이 많죠. 내가 도와주고자 하는 친구가 이성이다? 그럼 "야, 저 둘 무슨 사이야?"라는 말이 날아올지 모릅니다. 아무 사이가 아닐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2번 선택지, 좋습니다. 나쁘진 않죠. 그런데, 도움에 상하관계가 생기는 순간 위험이 생깁니다. 도와주는 대상이 내가 정말 아끼는 친구라든가, 혹은 나에게 지나칠 정도로 많이 의지하는 사람이라든가. 이러면 슬슬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하는 거죠.
희생적인 배려, 시혜적인 도움은 그다지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도움받는 사람의 자립성을 떨어뜨리고, 나를 지치게 해요.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시작한 도움의 의무가 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도움이 아니게 됩니다.
보상심리를 다시 끌어와봅시다. 난 분명히 노동을 했어요. 대가를 받을 만한 어떠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대가를 충족하기 위해 무언가를 받고 싶겠죠. 그런데, 누구에게서 뭘 얻을 건가요? '짱친'에게 나하고만 친구로 지내 달라고 할 건가요?
"나는 이만큼 해줬는데, 넌 나에게 해주는 게 뭐야?", "넌 왜 아무것도 안 해줘?"와 같은 생각이 든다면, 이미 위험하다는 신호입니다. 착각하기 쉽지만, 냉정해져야 해요. 당신이 무언가를 했다고 해서,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꼭 받을 거라는 착각을 버리세요.
저는 좋아요. 그리고 친구들도 제 도움을 많이 받았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저에게는 다소 무리였나 봅니다. 남들을 챙겨주면서 정작 저 자신은 챙겨주지 못했고, 저는 결국 최하점을 깔면서 아무런 대비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지난날들에 후회를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저 자신도 챙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챙기겠습니까. 저에게는 과분한 일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카루, 2020; 남을 챙겨주는 것도 좋아요, 그런데 제발 자기부터 챙기세요.)
이 문단을 다시 봅시다. 남을 도와준다고 해서, 남들이 나를 챙겨줄 거란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나는 내가 챙겨야 합니다. 나 자신은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니까요. 어쩌면, 유일한 동반자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당시 이걸 모르고 있었나 봅니다. 물론, 남이 나를 챙겨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겠죠. 적어도 겉으로는. 그러나 속으로는 믿고 있지 않았나 봅니다. 물론 그러한 도움이 언젠가 돌아오리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대체 언제일까요? 내가 그전에 죽을 수도 있는데.
이러한 상실감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크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너에게 이만큼 해줬는데, 왜 넌 이것밖에 안 해줘?"라는 착각. 애초에 그 기준을 정하면 안 됩니다. 설레발치지도 말고, 기대하지도 마세요. 곁에 있는 상대를 잃고 싶은 게 아니라면. 우리는 모두 다 다른 사람들이고, 방향도 서로 다르잖아요. 억지로 끼워 맞출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건 프레임에 갇힌 사고방식이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