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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 Jun 29. 2022

상대를 대하는 태도

Karu's Story #19

환영합니다, Rolling Ress의 카루입니다.


응원해줄 수 있는 친구


  나 혼자 잘 살겠다고 상대를 저버린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특히나 여기, 고양국제고에서는요. 옆 친구에게 잘하세요. 이 친구들이 당신을 이끌어주고, 당신도 이 친구들을 이끌어나가야 합니다. 혼자 간다면 빨리 갈 수는 있겠죠. 그런데, 언젠가는 지쳐 쓰러집니다.


  저는 상대평가를 죽도록 싫어합니다. 역겹다는 표현을 가끔 쓰는데, 그만큼 혐오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효율적이긴 해요. 인간적이지 않아서 문제지. 특히나 제가 더 역겹다고 하는 건, 저마저도 어느샌가 그 상대평가의 문턱에 끼어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남들을 비판할 처지가 아니라는 게 문제죠.


  10기까지는 수상 실적이 대입에 반영이 됩니다. 학기 당 하나. 3개년 합 5개면 차라리 나은데, 학기당 하나씩이라 오히려 더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한 학기에 한 번씩은 반드시 수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꼭 입상해야 하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나를 밟아버리고 상을 대신 차지했다면 어떨까요. 사실 이것도 엄밀한 평가 기준에 따른 심사이긴 하지만, 결국 상대평가로 인해 내 자리를 뺏긴 거잖아요? 원망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통계 지도 대회가 있었습니다. 44명이 참가했는데, 수상 인원은 전체의 20% 이내죠. 수상 대상자는 8명이었습니다. 아마 최우수 한 명, 우수 세 명, 장려 네 명, 이런 식으로 수상했을 겁니다. 끝까지 공지가 올라오지 않아 자세한 건 모르겠습니다. 저는 생기부 점검 과정에서도 수상이 존재하지 않아 굉장히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교무실을 돌아다니다 보니 상장이 주르륵 널려있더라고요. 보니까 제 이름이 있습니다. 통계 지도 대회, 결과는 우수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 최우수는 누구였을까요? 저의 1년 룸메이트였습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했던 친구가 좋은 결과를 얻으니 왠지 제가 다 흐뭇했습니다. 정말 잘했다고, 서로 칭찬해 주고 왔어요. '룸메끼리 상을 휩쓸고 오다니, 멋진데?'라고 서로 축하하면서 말이죠.


  이 외에도 고양국제고 인재상과 연계되는 대회의 경우 경쟁이 더욱 치열합니다. 아카데믹 스피치 대회의 경우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전국 국제고 연합 학술제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상위권 학생들의 경우, 상에 대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집니다. 운이 좋은 경우 혼자서 상을 수두룩하게 타고 오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경우 가끔씩 부러움을 받거나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준비했는데 결과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것도 간발의 차로 다른 친구들에게 짓밟혀버린다면 그건 절대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닐 겁니다. 분명 우리도 못하지 않는데,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단순히 '안타깝다'라는 말로 우리의 노력을 보상하긴 힘들죠. 그런 암울한 상황에 놓였을 때, 당신은 과연 상대를 응원해줄 수 있나요? 상대가 건네는 위로를 받아들일 수 있나요? 속상하더라도 그냥 넘기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아, 뭐 그럴 때도 있는 거지!' 하고. 정신을 잘 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자존감이 추락하면 끝도 없이 기어들어가요.


  '난 얘보다 열등한 사람인가?'

  '넌 왜 항상 나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인 거야?'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심한 경우 자학과 자기혐오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자학과 자기혐오. 제가 계속 강조하는 거지만 이게 계속되면 사람이 망가집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미리 싹을 잘라버리는 게 좋습니다.


다른 사람과 고민을 나눈다는 것


이 문단은 '카루에게 던진 Q&A (53)'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편의상 질문을 남겨주신 분을 '세타'라고 부르겠습니다.


  힘들 때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그러는 걸 긍정적으로 보시는 거 같은데, 저는 음...제가 그러면 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거 같고 약간 감정쓰레기통(?) 취급하는 거 같아서 너무 죄책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혼자 그냥 참아야지 하는데 제일 의지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게 안 돼서 좀...말이 너무 횡설수설하는데 그냥 이에 대해 카루님의 더 자세한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요.


아래는 위 질문에 대한 제 답변의 일부입니다.


  이미 숱하게 겪어봤기에, 여러분께서는 저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저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내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 있어요. 상대가 불편해할까봐. 힘들 때 "나에게 얘기해"라고 선뜻 마음을 열어주는 친구가 있어요. 그런 친구들에게는 저도 마음을 여는 편인데, 확실히 쉬운 길만은 아니죠. 더군다나 그렇게 마음을 열어주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트러블이 생겼다, 그럼 그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겁니다. 제가 하는 모든 말이 정답은 아니에요. 맞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겠죠. 남들에게 털어놓는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고, 후련해진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습니다. 물론 얘기하지 않고 자기 안에서 눌러도 돼요. 저도 그러니까.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게, 그렇게 쌓이다보면 언젠가 터집니다.


  사회는 잔인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체가 모여 사회를 이루죠. 그러나 그 집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낙오자는 철저하게 배제됩니다. 내 슬픔 따위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내가 직접 이겨내고, 헤쳐나가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까요.


  공동체 단위로 다시 눈을 돌려봅시다. 내게 정말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요? 그 친구에게 어떤 반응을 해줄 수 있을까요? 그 친구는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요? 분명, 링겔만 효과는 이런 곳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규모를 줄이면, '아, 누군가 대신 위로해주겠지'가 아니라 내가 직접 그 사람과 교감하고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죠.


  제가 공동체 역량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게 여긴다는 건 아마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 당신 옆에 있는 사람들, 또 앞으로 당신이 마주하게 될 사람들, 우리는 이들과 여러 가지를 공유하며 살아갑니다. 일종의 경험일 수도 있고, 기쁨과 슬픔, 행복과 좌절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주변에 손을 뻗기가 애매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나마 제가 자신 있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건 정말 제가 가깝다고 생각하는 친구들 뿐. 사실 저는 또래보다 윗사람이 편할 때가 많아요. 선생님들께 제가 겪는 스트레스를 말씀드리는 게 더 효과적인 해결책을 얻는 방법이 되기도 하고요. 일단 중요한 건 혼자서 끙끙대는 것보다 입 밖으로 내면 확실히 편해진다는 겁니다.


  제 1학년은 고양국제고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특히 시험 끝나고 정신이 크게 무너져서 친구에게 엉겨 붙듯이 칭얼댔던 적이 있는데, 그래도 그땐 다 받아줘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다만 나중에 들어보니 상당히 부담스러워서 밀어내고 싶었다고 하네요.


  내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뻗은 손길이, 상대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기적이면 편합니다. '내가 힘든데, 어쩌라고.'와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겠죠. 여러 사람 찾아다니면서 '나 힘든데 좀 도와줘'와 같은 부탁을 하고 다닌다면 오히려 자신에겐 최선일 수 있어요.


  세타님을 보면 뭔가 예전의 저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자신이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남 걱정이 먼저 되던가요? 아마 그러셨을 겁니다. 고민을 털어놓는 상황에서도 혹시나 상대가 불편해하진 않을지, 혹여나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더 편해지려는 행위가 상대를 힘들게 만들고 있진 않을지. 이런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정 누군가에게 저의 모든 것을 내비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빈틈을 보이기 싫은 겁니다. 특히, 내 모든 것을 특정한 상대에게 내어준다면 어느 순간 그 대가를 톡톡하게 치릅니다. 바로 그 상대와 연이 끊어졌을 때. 절교했을 때. 손절했을 때. 정신적 지주로 의지했던 상대방이 사라질 때, 상대방이 떠받쳐주던 나는 그대로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 나아가 마음의 문을 여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드는 거죠. 이제 와서 다시 할 수 있을까요? 이미 감정이 메말라버렸는데. 설령 감정이 남아있다고 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행복보다 우울함이 저를 더 크게 집어삼켜서, 고통받으면서 살 바에야 그냥 꿈속에서 깨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세타님께서는, 혹은 세타님과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는 여러분들께선 무엇 때문에 고민을 털어놓기 힘든 걸까요? 상대의 불편함을 헤아린 이타적인 마음이 전부인가요? 아니면 여러분 가슴속에 남아있는 찝찝한 두려움 때문인가요? 혹은 상대와 연이 끊어졌을 때가 두려워서인가요?


  이런 건 혼자 참고 쌓아두면 언젠가 터진다고 했죠. 그런데 세타님은 상대가 피해받는 게 싫으실 테고. 동의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고통받고 싶지 않다고, 상대방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것도 내키는 일이 아니죠. 너무 미안해지고. 상대가 겪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까지 겪게 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고민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정말 상대가 그걸 불편하게 생각할까요?"

  "상대에게 정말 그런지 직접 물어본 적이 있나요?"

  "세타님의 지레짐작은 아닌가요?"


  글 쓰다가 갑자기 생각난 질문들이에요. 생각해보니까 저도 비슷한 상황에서 상대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더라고요. 그냥 다 제 지레짐작으로 '아, 이러면 싫어하겠지. 귀찮아하겠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 같아요. 정작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일단 물어보세요. 고민을 털어놔도 괜찮은지. 저도 여러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런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본인은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런 거에 휘둘리는 멘탈이 아니랬나, 일단 저보다는 강철 멘탈이라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좀 안심이 됐어요. 상대의 대답을 믿는 건 세타님의 자유입니다. 안 괜찮은데 그냥 습관성으로, 혹은 대충 둘러대려고 "괜찮아."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상대가 그렇게까지 대답을 했으면 그냥 진실이든 거짓이든 믿어주세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나. 내가 없으면 주변 사람도 챙기지 못합니다. 힘들 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그들이 힘들 때 도움의 손길을 건네주는 건 어떨까요. 저는 그게 공동체의 꽃이라고 봐요. 서로가 힘들 때 끌어올려 주는 거. 낙오자가 없게끔.


관계의 패러다임


  상대를 100%로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요? 언제나 예외는 있겠지만, 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요. 자신과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과연 그 사람에게 내가 1순위 일지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요. 알 수 없으니까. 그냥 사물을 보면 단순하게 겉을 관찰하면 되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못하죠.


  겉모습은 쉽게 알 수 있어요. 그냥 쓱 둘러보면 되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의 내면이죠. 인간의 내면.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관, 행동 등이요. 상대가 말해주는 상대 자신의 모습에도 표현하기에 한계가 분명히 있고, 그 상대를 오랫동안 관찰한다고 해도 모든 걸 알 수는 없어요. 상대와 24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내적으로 상대를 '묘사'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예를 들어서, 다음과 같은 세 명의 인물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라에: 평소에 침울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자주 보임. 그러나 속은 항상 따뜻함.

실비아: 라에에겐 따뜻하게 대함, 키아나에겐 차갑게 대함.

키아나: 겉과 속이 동일하게 무뚝뚝한 사람.


  여기서 라에는 겉과 속이 다르고, 실비아는 사람에 따라 행동이 다릅니다. 키아나는 겉과 속이 똑같죠. 이 셋을 상호작용시키면, 각각의 인물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라에: 실비아는 따뜻하고, 키아나는 무뚝뚝해.

실비아: 라에는 우울한 사람이고, 키아나는 무뚝뚝한 사람이야.

키아나: 라에는 우울한 사람이고, 실비아는 차가운 사람이야.


  라에는 실비아의 단편적인 모습을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실비아는 라에의 속을 모른 채 라에게 우울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버렸군요. 라에, 실비아 모두 키아나가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맞죠. 물론 키아나의 겉과 속이 100% 일치한다는 전제 하에. 반대로, 키아나는 실비아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차갑다고 결론지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걸 알고 있으니, 이들이 대부분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는 걸 알 수 있죠.


  우리가 상대를 판단할 때 과연 그 상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상대를 마주할 때 상대의 전체를 판단의 기초로 삼지 않아요. 우리가 멋대로 만들어낸 상대의 사본을 바탕으로 상대를 해석합니다. 여러분이 보는 카루는 어떤 사람인가요? 블로거? 유튜버? 잘해봐야, 제가 SNS에 올리는 글이나 영상들 내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들이겠지요. 그 밖의 모습은 제가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여러분이 경험하지 않았으니까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겠어요. 사람을 좋아하고 누군가의 내면을 관찰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남들에 비해 좀 더 많이 알 수는 있을 거예요. 그래도, 한계는 존재합니다. 그 사람의 트라우마,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까지 여러분이 캐낼 수는 없어요. 극단적인 경우 그러한 행위의 시도 자체가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상호작용할 때는 그 사람의 일부만을 보고 소통합니다.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위에서 설명한 것들이 제가 설명하고자 한 '대상관계'에 대한 예시입니다. 대상관계란, 쉽게 설명하자면 "주변과의 관계를 그려낸 나만의 내부 모형"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네요. 사실 대상관계라는 건 훨씬 더 복잡한 개념이긴 한데, 여기서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개념을 살짝 빌려서 서술하겠습니다.


  중심은 카루입니다. 카루의 내면에는 라에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라에를 100%로 추종한 인물은 아니고, 그저 카루가 보는 라에를 바탕으로 본뜬 상(이미지)이에요. 쉽게 말해서, 카루가 생각하는 라에를 자신의 내적 세계에 그려낸 거라고 보면 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투사입니다. 카루가 내적 세계에 라에를 그려놨으면, 투사를 통해서 현실의 라에를 해석합니다. 실질적으로는 라에라는 인간의 껍데기에 카루가 생각하는 라에의 모습을 덧씌워 상호작용하는 거라고 볼 수 있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 라에와 카루에게 맺힌 라에의 상은 다르다 라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상대의 모습이 정말 그 상대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이걸 깨닫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어떤 사람들은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죠. 저도 그렇게 착각했으니까. 그런데, 단순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그 사실을 바탕으로 상대를 이해하는 데엔 생각보다 꽤 많은 차이가 있더라고요. 


  카루의 내면에는 현실의 카루를 투영한, 카루가 보는 카루(자기 표상)가 존재하죠. 외부 현실 세계에서 '현실의 카루'는 '현실의 라에'와 관계를 맺지만, 카루의 내부 세계, 즉 대상 표상들로 채워진 카루의 내부 정신세계에 있는 라에의 대상 표상과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대상의 일부를 부분 대상이라고 하고, 대상의 전체를 전체 대상이라고 합니다. 부분 대상을 전체 대상으로 통합시킬 수 있을 때, 심리적으로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표현합니다. 이걸 위에서 들었던 예시에 다시 적용해볼게요.


라에: 평소에 침울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자주 보임. 그러나 속은 항상 따뜻함.


  카루는 라에의 모습을 보고 라에에 대한 대상 표상을 만들어냅니다. 카루 마음속에 있는 라에는 그저 늘 우울하고 무기력한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라에의 본모습인가요? 아니거든요. 침울한 모습도 라에의 부분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 라에의 전체 모습일 거라고 확대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의 전체에서 부분을 분리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대인 관계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대부분의 스트레스를 경감시켜줍니다. 중요한 건, 상대에게 나의 패러다임을 함부로 씌우면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가 만들어낸 편향에 갇히게 되는 꼴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대상관계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상대의 모습이 상대의 본모습이 아닐 수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타인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아닐까 싶어요.


  제 고질병이 하나 있습니다. 상대가 나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저를 싫어한다고 멋대로 생각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제가 계속 언급하지만, 누군가의 배경엔 필연적인 역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안 좋은 기억이 지금의 저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그것도 결국 제가 만들어낸 부분 대상일 뿐인걸요.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를 자신에 대한 평가 척도로 삼지 말란 말이 있습니다. 상대가 갑자기 나에게 퉁명스럽게 대할 수 있죠. 그날따라 피곤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과 싸웠을 수도 있고, 몸이 아플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모습은 상대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상대의 전체가 아니에요. 물론, 내가 만들어낸 상대의 모습, 즉 나의 내면에 있는 상대의 대상 표상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괴리감이 느껴지는 건 당연합니다. 그래도, 상대의 또 다른 부분을 마주했다면 내가 갖고 있는 프레임을 억지로 덧씌울 게 아니라 기존에 형성된 대상 표상을 수정해야 할 필요도 있는 셈입니다.


  고민상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고민을 들어줄 때, 상대의 약점을 알게 되거나 어두운 면을 보게 되면 마음이 썩 편치는 않을 겁니다. 상대의 새로운 모습을 보면, 그건 그냥 그 상대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넘기세요. 그것 때문에 괜히 상대에 대한 환상을 부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봐왔던 것도 상대의 일부고, 지금 마주하는 모습도 일부일 뿐이니까요.


  한동안 저도 제 안에 여유가 없었어요. 주변 사람에게 관심도 없었고요. 그런데 점점 생각이 바뀌어가는 듯합니다. 나에게 차갑게 굴던 사람, 태도가 변한 사람, 피해를 주었던 사람들. 모두가 힘들었구나. 내가 못 보던 모습이 있었구나. 내가 알고 지내던 네가 전부가 아니구나. 이런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요. 앞으로 제가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관계를 그려나갈 텐데, 인간관계를 모두 공식화해서 풀어나갈 순 없잖아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마음을 더 열기 위해 사람에 대해 알아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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