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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 찢어버리고 싶은 시

시 백일

by 설애

이상의 [이런 시]가 적힌 Yes24 굿즈입니다.

이상에게 이런 시가 있다니, 이상의 시집을 뒤적여 전문을 찾아보았어요.


이런 시


이상


역사(役事)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여놓고보니 도모지어데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木徒)들이 그것을메고나가드니 어데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危險)하기짝이없는 큰길가드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얐으니 필시(必是)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드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량(悽凉)한생각에서아래와같은작문(作文)을지였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든 그대여 내한평생(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골을 물끄러미 치여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詩)는그만찢어버리고싶드라.


[이런 시] 안에 쓰인 [찢어버리고 싶은 시]만 떨어져서 인용이 되고 있네요.

마치 셜록홈즈가 살아남은 것처럼요.


시 일부만 유명한 다른 시도 같이 가져와 봤습니다.


고독


엘라 휠라 윌콕스


웃어라, 세상은 너와 함께 웃을 테니,

울면, 너 혼자 울게 되리라.

이 낡고 슬픈 세상은 즐거움은 빌려와야 하나,

고통은 이미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노래 부르면 언덕들이 따라 부르나,

한숨 쉬면 허공에 흩어질 뿐.

메아리는 기쁜 소리엔 함께 뛰놀지만,

근심 깃든 소리는 멀리할 뿐이네.


기뻐하라, 사람들이 널 찾을 테니,

슬퍼하면, 그들은 뒤돌아 떠나리라.

그들은 너의 기쁨 전부를 함께 하길 원하나,

너의 근심은 하나도 원치 않으니.

기뻐하라, 네 친구들이 많을 테니,

슬퍼하면, 그 모두들 잃으리라,

누구도 너의 달콤한 와인을 사양하지 않지만,

인생의 쓴 잔은 너 혼자 마시게 되리라.


연회를 베풀면 네 집은 사람들로 붐비지만,

네가 굶주리면, 온 세상이 너를 피하리라.

성공하여 베풀면, 너의 삶에 도움이 되지만,

어느 누구도 너의 죽음을 도울 수 없으리라.

쾌락의 연회실에는 많은 사람을 위한

넓고 품위 있는 행렬의 공간이 있으나,

우리 각자는 고통의 좁은 복도를

한 사람씩 줄지어 통과해야만 하네.



이 시는 첫 구절이 익숙하시죠?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 역)가 갖혀있는 방에 쓰여있는 글로 유명해졌습니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죽음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하나 더, 청첩장을 받았더니 이런 구절이 있어요.


예쁜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언제나 손을 잡고 있게 될 것이다

연인


이이체


우리는 서로의 몽타주다

나는 세계를 지우는 일을 했고

너는 세계를 구성하는 구멍에 빠졌던 가난


의붓아들과 의붓딸의 만남

우리를 낳지 않은 우리의 부모들을 탈각했다

가진 적도 없던 것을 지키려고 애썼고

서로 악수하면서 서로의 손을 혼동해서 침묵했다

우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게 되었음에도

거울로 방을 가득 채웠으며

서로의 혈액형도 모른 채 피를 섞었다


나는 녹슨 문 앞에 앉아

고드름을 부러뜨리는 부랑아

너는 너에게도 어울리지 않아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치환하지

우리가 살찌고 행복해서 질려버릴 때

잊을 수 있겠지만 잊지 않겠다는 주(呪)를

미신처럼 읊조릴 거야

내가 없었던 세상을 가장 근처에서 만지는 일

네가 없는 꿈을 꾼 적이 없다


우리는 유기되었다

세계와 거의 비슷해지는 중이다

없애러 간 곳에서 얻어서 돌아올 것임을 안다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몸이 부풀어 오른다

예쁜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언제나 손을 잡고 있게 될 것이다


시 전체를 보면 청접창에 쓰일 구절이 아닌 것 같아요.

인터뷰에서 시가 청첩장에 쓰인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읽히는 시를 써냈다는 뜻이 아니냐는 질문에, 이이체 시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윗구절들은 연애의 참혹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예쁜 단면들만 봐주시는 것 같다. (웃음) 사실 대중에게 와닿는 시를 쓰는 건 내게 중요하지 않다. 많이 읽어주면 감사하긴 하지만 예술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개인의 언어이고, 소통은 예술작품 이후에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보단 예술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

인터뷰 중


이따금 글에도 생명이 있어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설애가 당신의 행복을 바라며 시 한 잔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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