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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묘비명: 집착이 없다

모리야 센얀, 중광스님/걸레스님

by 설애

인생에 대해 평가하지 않으며 집착이 없다.


집착이 없는 사람들

인생을 마치면서도 슬픔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사람들이 있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 피터팬같은 사람들에게는 집착이 없다고 느꼈다.




술통 밑에 묻어줘

<술통>이라는 하이쿠1)에서 모리야 센얀이라는 일본의 선승은 자신을 술통 밑에 묻어달라고 한다.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술통 밑에 있으면 술이 샐지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있다. 진지함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이 선승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이 하이쿠만 보면 세상에 아무 미련이 없어 바라는 것도 남기는 말도 없이 죽으면 술을 못 먹어 어떻게 하나 걱정하는 마음, 그리고 이미 말했듯 술을 마실 수 있을거라는 희망만 보일 뿐이다.


내가 죽으면
술통 밑에 묻어 줘.
운이 좋으면
밑둥이 샐지도 몰라.

모리야 센얀(일본 선승, 78세)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중에서


1) 하이쿠: 일본 정형시의 일종이다. 각 행마다 5, 7, 5음으로 모두 17음으로 이루어진다. 일반적인 하이쿠는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인 기고(季語)와 구의 매듭을 짓는 말인 기레지(切れ字)를 가지는 단시(短詩)이다. 하이쿠를 만드는 사람을 하이진(俳人)이라고 부른다. (출처: 위키피디아)




괜히 왔다 간다

생전에 '걸레스님'으로 불리던 중광(重光) 스님(1934-2002, 본명 고창률)은 "괜히 왔다 간다"라는 묘비명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분을 들어본 적이 없으므로 검색을 통해 불교 승려이며 시인이며 수필가이며 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63년 통도사에 출가하였으나 계속된 기행으로 1979년 파문되었다고 한다. 한참 활동하던 1980년~1990년 당시에는 시인 천상병, 소설가 이외수와 함께 기인삼총사로 불렸다고 하니, 나만 몰랐던 유명하신 분이었나보다.

걸레 시를 쓰고 '걸레스님'이 되었다고 하니 시도 같이 본다. 답시와 같은 시가 있어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윤제림 시인의 <걸레스님>이다. 연달아 소개한다. 걸레라는 것도 남들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닦아주는 것으로 남들이 좋게 해석할 뿐, 본인은 수동적인 걸레, 다 떨어지고 쓸모가 없어져서 사람들이 쓰면 쓰고 버리면 버리는 물건의 의미라고 한다.


나는 걸레다.
내 생활 전부가 똥이요 사기이다


참고 : 중광스님에 관한 글



나는 걸레


중광스님


나는 걸레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

삼천대천세계는

산산이 부서지고

나는 참으로 고독해서

넘실넘실 춤을 추는 거야

나는 걸레


남한강에 잉어가

싱싱하니

탁주 한 통 싣고

배를 띄워라


별이랑, 달이랑, 고기랑

떼들이 모여들어

별들은 노래를 부르고

달들은 장구를 치오

고기들은 칼을 들어

고기 회를 만드오


나는 탁주 한 잔 꺽고서

덩실 더덩실

신나게 춤을 추는 게다

나는 걸레


걸레스님


윤제림


청소당번이 도망갔다

걸레질 몇 번 하고 다 했다며

가방도 그냥 두고 가는 그를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괜히 왔다 간다'

가래침을 뱉으며

유유히 교문을 빠져나가는데

담임선생님도

아무 말을 못했다.


'괜히 왔다 간다'는 묘비명은 이 세상에 미련은 하나도 없는, 툴툴 대며 떠나는 자세다. 이 묘비명은 분명 '걸레스님'인 중광스님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잘' 왔다 간다가 아닌 '괜히' 왔다 간다는 남은 이들에 대한 인사도 아니고, 살아온 인생에 대한 존중도 아니다. '그저' 왔다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왔다 가는 것도 아니고, '괜히' 왔다 가는 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후회에 가깝다. 그 후회는 인생의 어느 부분이 아닌 인생 전체, 태어남에 대한 후회라고 생각한다. 즉, 생에 대한 아무런 집착이 없는 상태로, 윤제림 시인은 가방 놓고 간다고 했다.

중광스님은 이승으로 다시 안 올 모양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우연인지, 나란히 놓고 보니 일본과 한국의 술 마시는 스님들의 묘비명이다.

스님은 오욕칠정에서 벗어나 해탈해야 한다. 그런 스님께서 술을 드시는 것은 해탈한 것인가, 그저 파계승인가?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노스님이 비오는 날, 강을 건너지 못하는 처녀를 업어 건너다 준다. 동자승이 이를 보고 한참 걷다 묻는다.


“스님, 우리는 출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자를 업고
강을 건널 수 있습니까?”

그러자 노스님은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미 그 처녀를 내려놓았는데
너는 어째서 20 리를 업고 온 채
아직도 내려놓지 않느냐?”


지금 업고 있는 것, 내려놓은 것, 내려놓아야 하는 것을 생각해본다.

그래서 버리고 갈 것만 남았다.2)


2)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유고 시집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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