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이윤탁
죽어서도 무서운 것이 있다. 그것은 도굴이다.
셰익스피어의 저주, 내 뼈를 옮기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영국 최고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사망하여 영국 잉글랜드 중부 성 트리니티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의 흉상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GOOD FRIEND FOR JESUS' SAKE FORBEAR,
TO DIG THE DUST ENCLOSED HERE.
BLESSED BE THE MAN THAT SPARES THESE STONES,
AND CURSED BE HE THAT MOVES MY BONES.
"벗이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청하노니,
이곳에 묻힌 흙먼지를 파헤치지 마라.
이 돌들을 아끼는 자에게는 축복이,
내 뼈를 옮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어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16세기에는 새 무덤을 만들기 위해 시신의 뼈를 파헤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파헤쳐진 유해는 시체 안치소에 보관되었고, 이를 두려워한 셰익스피어가 저주의 묘비명을 써 이를 방지하려고 했을 수 있다. 이후 18세기에 과학과 의학이 발전하면서 시체를 도굴해 해부하거나, 두개골만 도굴하여 연구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1879년 셰익스피어의 두개골이 도난당했다고 보도되었으며, "사람들은 유명 인사의 두개골을 분석하면 그들이 어떻게 천재적인 재능을 갖게 됐는지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셰익스피어가 그 대상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2016년 레이더로 무덤을 조사하여 그의 두개골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의 두개골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묘비명으로 그의 무덤은 아직까지 열지 못하고 있다. 다만, 무덤이 많이 훼손되어 2008년에는 무덤을 파지 않고 보수를 진행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두개골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의 저주는 누가 받은 것일까?
아들이 부모의 묘를 보호하려고 비문을 새기다.
이윤탁은 중종 때 승문원 부정자를 지냈다. 원래 묘는 태릉 자리에 있었으나, 국가가 그 지역을 수복하면서 이장을 해야 했다. 1536년 이장을 하면서 아들 이문건이 부모의 묘가 다시 파헤쳐지는 일이 없도록 비석에 경계문을 새겼다. 비의 앞면에는 묘 주인의 이름을, 뒷면에는 일대기를 적었으며, 양옆에는 한글과 한문으로 경계문을 새겼다.
왼쪽에는 한글로
“신령스러운 비다. 쓰러뜨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오른쪽에는 한문으로
‘불인갈(不忍碣)’
197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7호 '한글고비'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대한민국의 보물 제1524호로 지정되면서 지정명칭도 '이윤탁 한글 영비'로 변경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아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9년 6차선 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와 성주 이씨 종중이 반대하여 병목이 생긴 채로 도로를 개통해서 쓰다가, 1998년 묘를 도로 바깥으로 15m 옮기기로 합의하여 묘비와 함께 이장을 했다. 2012년 도로명 주소를 도입하면서 묫자리 옆을 지나가는 6차선 도로에 '한글비석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비가 대한민국 보물인 이유는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90년이 지난 1536년 만들어진 비로, 한글창제 당시와 똑같은 글씨에 서민적인 문체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한글비’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아직 한글이 널리 사용되지 못했던 시기에 과감히 ‘한글묘비’를 세웠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돋보이며 국어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무덤을 지켜라
영국과도 바꿀 수 없는 유명한 작가 셰익스피어가 스스로 쓴 묘비명으로 스스로를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부모의 묘를 다시 이장할 수 없어 아들은 한문을 모르는 이도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도 비석을 세웠다.
죽어서 내가 두 눈 뜨고 바라볼 수 없고, 싸울 수 없으니 방법은 저주뿐이다.
저주를 걸어서라도 내가 죽어서도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