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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묘비명 : 쓰지 않거나 없거나

측천무후, 만력제, 정병주, 박경리, 브레히트

by 설애

할 말이 없거나 쓰지 않거나 없거나,

그러나 사연은 있다.


무자비(無字碑), 백비(白碑)란?

중국 역사상 유일의 여자 황제인 측천무후(624-705) 묘비는 유언에 따라 아무런 글자도 없는 무자비(無字碑)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실력 있는 자들이 등용되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그녀는 근무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였으며, 심지어 사형을 내리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평은 극명하게 갈리니, 업적이 커서 도저히 글로써 남길 수 없다는 극도의 자만인지, 아니면 차마 글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겸양의 표현인지 확실하지 않다.


명나라 임금 만력제(1560-1620)의 '신공성덕비'가 있다. 만력제가 비석을 세워서 자신의 공덕을 기록하라고 명령했지만, 실제로 그가 한 것이라고는 나쁜 짓밖에 없어 적을 것이 없어 '무자비'가 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 구실을 대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나라에 아무리 위급한 일이 생겨도 동전 한 닢 내놓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였다. 반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다. 황제 개인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늘어 갔으나 국고는 점점 줄어들었다. 황제가 돈을 밝히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치부(致富)에만 열성을 보였다. 거기다 술과 여자까지 밝혔다. 측천무후와는 정반대 사례다.


전 대한민국 특수전사령관인 정병주(1926-1989)의 묘비도 아무 내용이 없다. 유가족의 뜻으로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들이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활보하는 세상에 고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라는 의미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서울 근방 부대 중 쿠데타에 반기를 든 3명의 장성 중 1명이었다. 이때 반란을 준비하던 보안사와 하나회 소속 장교들은 저항하면 골치 아픈 주요 지휘관 정병주, 김진기, 장태완을 술자리에 초대하여 그들의 발을 묶어놓는 모략을 꾸몄다.


죽산 조봉암(1899-1959)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당하여 비석에 글을 새기고자 하였어도 국가가 허락하지 않아 새기지 못했다. 침묵의 항변이 아닌 죽은 사람의 말문조차 막은 것이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지금은 아래와 같이 묘비명을 적어두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출처: 네이버 김남원의 유적답사 블로그

무자비는 업적이 많아서 못 적거나, 겸양이거나, 적을 업적이 없거나, 할 말이 없어서, 말할 수조차 없어서이다.

묘비가 있는데, 비워두는 무자비의 이유는 많지만, 흔하지 않다.

굳이 비워두는 묘비는 글자가 없을 뿐 사연이 없지 않다.




묘비가 없다

<토지>의 저자인 박경리의 묘에는 묘비가 없다. 이는 화려함을 싫어했던 선생의 뜻을 따른 것으로, 무덤의 봉분과 흙도 소박한 자연 그대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박경리의 묘, 출처: https://ncms.nculture.org/exotic-museums/story/8848

시인 브레히트는 성명만 적은 묘비가 있으며, 그도 묘비가 필요 없다고 했다.




침묵도 의미가 있음을

무자비와 묘비를 세우지 않음으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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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